장단종인사록(長湍宗人私錄)


시조 태사공(太師公)의 묘는 경주(慶州) 기계현(杞溪縣) 벌치동(伐治洞) 구봉산(九峰山) 아래 유좌(酉坐)의 언덕에 있다. 공이 동경(東京:慶州)의 유수로 계시다가 임소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경주에 장사지내고 부인 유씨(柳氏)도 합장하였다(고려 태조왕비(太祖王妃)와 신장절공(申壯節公:申崇謙)의 부인이 모두 유씨라고 한다). 2세 벽상공신공(壁上功臣公)의 묘는 풍덕(豊德) 덕물현(德物縣) 남쪽 25리 증택(甑澤)의 위북쪽 인좌(寅坐)의 언덕에 있으니, 공이 인질로 송경(松京)에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셔서 장차 경주로 모셔가 장사지내려 하였는데, 괘감령(掛龕嶺)을 넘다가 상여가 부러져서 멈추고 그 곳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씨(丁氏)라고 한다. 3세 좌복야공(左僕射公)의 묘는 위와 같은 곳인데, 속칭 ‘윤금릉(尹金陵)’이다. 같은 언덕에 있다. 부인은 유씨(庾氏)와 왕씨(王氏)니, 각각 장사지냈다. 4세 소감공(少監公)의 묘는 파주(坡州) 분수원(焚修院) 위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으니 앞에 교자총(轎子塚)이 있고, 청룡(靑龍) 밖에 전마총(戰馬塚)이 있다. 부인은 소성(邵城) 이씨(李氏)니, 묘지는 연안(延安) 자달동(紫達洞)에 있다. 6세 문강공(文康公)의 묘는 문숙공(文肅公)의 묘와 같은 곳에 있으니, 심재상(沈宰相)의 묘위에 있으며, 용미(龍尾) 뒤에 있다. 7세 이부시랑공(吏部侍郞公)의 묘는 임단 석주원(石柱院) 남쪽에 있다. 8세 서경부유수공(西京副留守公)의 묘는 임단 석전곡(石田谷) 유좌(酉坐)의 언덕 집터 뒤에 있다. 여기에 입암(立巖)이 있는데, 부인 김씨가 노비 설매(㐥梅)로 하여금 동네 가운데에 쌓아 돌무더기로 표석을 삼았다 한다. 서쪽에 긴 골짜기가 있고, 북쪽에도 긴 골짜기가 있으니, 도랑의 물이 갑파(甲破)에서 합한다. 석주원(石柱院)과의 거리가 남쪽으로 5리요, 문현공(文顯公)의 묘로부터는 서쪽으로 10리이다(「좌계종인사기(左溪宗人私記)」에 이르기를, 지금은 우원주(禹原州) 묘소의 계단 섬돌 앞이라 한다). 9세 녹사공(綠事公)의 묘는 위와 같으니 혹은 덕현(德峴) 남쪽 1리 자좌(子坐)에 있다고 한다. 10세 감찰어사공(監察御使公)의 묘는 위와 같으니 매송현(梅松峴) 위라 한다(위와 같다는 것은 같은 군(郡)이라는 것이요, 같은 기슭이라는 것은 아니다). [주석 : 내가 예전에 「장단종인사록(長湍宗人私錄)」 일체를 얻어 보니 시조 태사공 이하 10대의 묘지와 4대의 부인이 자못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근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감히 깊이 믿지 못하였다. 뒤에는 기계(杞溪) 분수원(焚修院)의 두 산이라는 설이 서로 같았지만 믿을 만해도 또한 그 보첨에 기록된 것을 견강부회하는 것이라 여길 따름이었다. 지금 풍덕(豊德)에서 양세의 묘지를 거듭 찾고 보니, 그 지명. 도리(道里). 좌향(坐向). 속칭이 기록과 조금의 차이도 없어서 비로소 그것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실로 이 기록을 근거하여 힘을 다해 정성껏 찾는다면 소감공(少監公) 이하 여러 공의 묘를 또한 어찌 일시에 찾을 방도가 없겠는가? 지금 풍산(豊山)의 묘문으로 추정하여 보책을 간행함에 이에 이 기록을 첨부하여 뒷날 사람들의 근거 자료로 삼고자 한다.] 성상(聖上) 5년 신축년 8월에 하완(下浣) 동섬(東暹)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