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貞熹王后)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이다.
1418년(태종 18) 홍주군아(郡衙)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수봉되었다가 이후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정희왕후 윤씨(재세 :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에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선 선조 대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는 거사 때 모의가 새어나가 손석손(孫碩孫) 등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用兵)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55년(세조 1)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다.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또 1471년(성종 2) 원숙휘신혜의신헌(元淑徽愼惠懿神憲)을 가상하였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선왕이 후사에 대한 유명이 없을 경우에는 그 권한은 대비가 하게 되어 있었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일찍 죽은 첫째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그 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483년(성종 14)에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자성흠인경덕선렬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神惠懿神憲貞熹王后)이다.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폐비 윤씨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고 ,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1776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 뒤 투기가 심해 구곰로서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 비상(砒霜)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嬪)으로 강등될 뻔 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 되었다.
1479년 왕이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 한다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된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 했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러자 폐비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한편, 1482년 조정에서는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즉,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와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왕의 후궁들인 숙의(淑儀) 엄씨(嚴氏),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폐비를 모함하였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없었다.
그런데 폐비의 혈육인 세자가 점점 성장함에 따라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폐비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는데, 이들 내시와 나인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왕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좌승지 이세자(李世佐)에게 사사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묘명도 없이 장단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1489년 세자 즉위 이후를 고려한 왕의 배려로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리고 묘지기를 두어 관리하였다.
그리고 이어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 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 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伸寃)을 모색 했다. 1497년 폐비의 묘를 개장(改葬)한 뒤 효사(孝思)라는 묘호(廟號)와 회(懷)라는 묘호(廟號)가 추봉되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무단적 분위기에서 성종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무시되면서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승했으며 묘도 회릉(懷陵)으로 개칭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효사의 묘호도 혜안전(惠安殿)으로 개칭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다시 관작이 추탈된 뒤 영영 신원되지 못하였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출산한 정궁이면서도 투기심 등 부덕한 행위로 폐비되었다가 참극을 당하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연산군이 실정으로 치달아 폐위되는 비극의 촉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정현왕후(貞顯王后)
본관은 파평(坡平).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濠)의 딸이다.
신창(新昌) 공아(公衙)에서 출생하여 1473년(성종 4)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졌고, 1479년 6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1497년(연산군 3)에 자순(慈順), 1504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1530년(중종 25) 8월 경복궁에서 죽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고,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장경왕후(章敬王后)
본관은 파평(坡平).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491년(성종 22) 7월에 호현방(好賢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나 이모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에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지고 1507년(중종 2)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손위(遜位)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2월에 세자(世子)를 낳은 뒤 그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경복궁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휘호(徽號)는 숙신명혜(淑愼明惠)이며, 1547년(명종 2)에 선소의숙(宣昭懿淑)이라 추상되었다. 1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선소의숙장경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능호는 희릉(禧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동안 동생인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에게 정권을 쥐게 한 결과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원로(尹元老)를 해남(海南)으로 귀양보내고 윤임 등을 사사하였다.
일설에는 문정왕후가 건네준 독이든 떡을 먹고 인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고,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기도 했는데 승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1550년(명종 5)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실시하였고,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이장시켰다. 1553년 국정을 왕에게 맡겼으나 실질적인 대권은 계속 장악하여 윤원형 등 친척에게 정사를 좌우하게 하였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문정왕후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은 명종·의혜공주(懿惠公主)·효순공주(孝順公主)·경현공주(敬顯公主)·인순공주(仁順公主) 등 1남 4녀이다.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成烈仁明文定王后)이고, 능호는 태릉(泰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