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9성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이미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 때문에 고려인들은 고씨가 세운 고려가 쭉 내려오다 중간에 끊어진 걸 왕씨의 고려가 다시 이었다는 역사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후대 왕조와의 구분을 위해 고구려라고 부를 뿐이다. 윤관이 여진을 공략한 뒤 성벽에 적은 글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이 드러난다.

윤관 행영 대원수

별무반의 필요성과 고려의 취약점을 알고 타개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여진족들을 대군을 모아 재빠르게 몰아내고 길목을 막자는 등 인건의 의도와 대안점에 발상은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이전에 있던 서희와 강감찬 같은 문관과 달리 정작 그 대안과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의 구체적인 부분에선 아쉬움이 많다. 대표적인 예시로 동북 9성을 건설하는 지형의 친 고려파 여진족을 숙청하는 오판이 있다. 이 2개는 짧게는 동북 9성 반환때까지 심하게는 그 이후로도 영향을 준 오판중 오판이다. 여진정벌 이후 고려는 여요전쟁 이후 축적해온 힘을 크게 손상을 입어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고, 완전 장악하다시피 한 동여진 쪽에선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고려의 문신, 장군. 동북 9성 개척에서 활약한 인물이라 무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 시대의 서희, 강감찬이나 뒷날 조선시대의 김종서, 권율 등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다. 게다가 고려 때에는 조선과는 달리 무과 자체가 활성화 되지 못했고, 있어도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대신 무신들은 대대로 세습으로 유지했다. 고려는 예종과 공양왕 때를 제외하곤 무관을 따로 뽑지 않았다. 따라서 전시에는 문관이 전쟁을 진두지휘 하고, 무인들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함께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문관들도 병법에 능해야 했고 반대로 무관들은 실전 무술이 뛰어나야 했다. 그리고 문관이 전쟁에서 맹활약 한 사례는 윤관 뿐만이 아니다. 귀주대첩의 강감찬, 묘청의 난의 김부식, 제1차 요동정벌의 이인임, 4군 6진 개척의 주역 김종서, 임진왜란의 권율도 문관 출신이며 고려 최고의 인간 흉기라 불리던 척준경도 중추원별관 출신, 즉 문관으로 전쟁에 참가 했었다. 이들과 비슷하게 군사적 업적 때문에 무관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린 케이스. 작위는 백작(伯爵). 봉지는 고려의 영평현이다.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이고 아버지 윤집형이 '검교소부도감'이라는 직책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집안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다만 검교소부도감이 그렇게 높은 관직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집안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파평윤씨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냥 윤집형의 재능이 별로 였을 수도 있다. 단적으로 당시는 혼인은 가문간의 결합인데 윤관의 어머니가 속한 가문을 보면 실제로 가문이 별볼일 없었는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애초에 소소한 명문가였던 파평윤씨 일가가 고려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게 윤관 이후의 일이다. 당장 윤관의 출생연도 부터가 미상이다. 이 점을 볼 때 윤집형 개인의 재능이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많이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고려나 조선이나 혼인은 명문가의 여인과 그보다는 조금 가문의 격이 떨어지지만 능력있는 남성 간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즉 명문가에서 가문은 조금 쳐지지만 장래성 있어 보이는 사위를 스카우트해서 밀어주는 셈이라고 보면 된다. 어머니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예라 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숙종이 즉위하자 숙종의 즉위를 요나라에 알린 이후 출세길이 트여 여러 내직을 거쳤다. 1104년에 여진족이 강력하게 성장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북방에 진출했으나 패배,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이에 숙종에게 고려군의 문제점을 진언하고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여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이라는 부대를 만들어 이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천리장성 밖에서도 근처에 자리잡은 여진족들에 관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근데 그 천리장성 밖 여진족들이 준동하면서 천리장성을 위협하자, 아예 간접 지배가 아닌 군사적 점령을 통한 직접 지배를 고려한 것. 고구려 계승 의식에 따른 고토 수복이란 명분과 오랜 전성기를 거치며 늘어난 인구수(물론 추정)에 따른 토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동북 9성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9성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비석을 세우는 고려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일부이다. 별무반을 편성해 훈련을 시키며 침략을 준비하던 중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한다.

예종은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윤관으로 하여금 1107년에 17만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함경도 일대로 출진, 그지역의 여진족을 격파하고 그 일대에 동북 9성을 쌓게 하였다.

9성은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숭녕·통태·진양의 9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윤관이 고려와 여진족의 국경을 표시한 비석을 세웠다는 선춘령의 위치가 제일 논란이 된다.

선춘령 비석

함흥평야설, 두만강 유역설, 두만강 이북설, 함경도 일원설 등이 있는데, 이게 조선시대에도 국경 문제와 연관되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엔 20만 대군을 앞세워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땅을 손쉽게 점령, 9성도 별 어려움 없이 세웠으며, 이 공으로 예종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개경에 가서 큰 상을 받았다. 당시 조정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 하지만 얼마 안가서 곧 여진족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었고, 동북 9성은 점령을 넘어 과연 그 유지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윤관의 전략은 9성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병목 지형으로 막혀 있다는 정보를 믿고 짠 것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우회 루트가 여러 곳 존재하는 바람에 9성이 모두 여진족의 공세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비상의 문제점과 재정 문제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이를 두고 윤관의 공을 시기한 조정 대신들의 모함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9성의 수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진족은 9성의 곳곳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한때 길주성은 여진족이 성벽을 넘어 들어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윤관과 오연총의 구원군은 여진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전진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밤 사이에 고려군이 토벽을 쌓아 가로막기는 했지만 고려의 방어능력도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에 여진족은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던데 반해 고려가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있었는지도 살펴볼 부분이다. 참고로 당시 여진은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을 주축으로 그들을 만주의 여진족들이 지원하는 양상이었다. 특히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결국 고려는 9성 중 2개를 잃었고, 여진족과 회전을 벌여 대패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를 돌려줘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또한 9성을 돌려 받은지 얼마 안되어 이들이 곧 금이라는 신흥 제국을 건설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만큼 당시의 여진은 꽤 강했다.

그리고 금이 요나라와는 달리 고려에 대한 외교를 온건 일변도로 간 것도 동북9성에서의 처참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어느정도는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여겨진다. 실제 여진족=금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쳐들어온 침략자에게 땅을 되찾겠다고 죽을 힘을 다해 창칼을 휘두르면 약해 보이는데도 일패도지인데, 실제 무력을 통한 수복이 아닌 외교적 방법으로 혓바닥을 놀려서 온갖 아양을 떨었더니 뺏긴 9성을 고려한테서 돌려받았다고 하면 이후의 고려에 대한 정책이 실제적인 무력을 사용한 전투보단 전투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무력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여진의 동북 9성 반환 요청전에 이미 2성은 함락시킨 상황이었고 고려는 역대로 손꼽히는 패전인 갈라수 전투를 맞이한 상태였다. 특히 갈라수 전투는 귀주대첩과 같은 회전이었는 데 이때 오연총이 이끄는 5~7만 대군이 여진족들에게 대패했다.

그렇지만 이때 당시 여진이 승리는 했어도 9성 전부를 함락시킨 상황도 아니었고 고려가 멸망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는 여전히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이때 한 것이 강화 요청. 즉, 무력+외교로 9성을 반환시킨 것이다. 이는 귀주대첩 이후 고려가 거란에게 취한 자세와 비슷하다. 어쨌든 여진 정벌에서 돌아온 후 패전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잠시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종의 비호로 다시 최고 재상직인 '수태보문하시중'으로 복직했으나 얼마 못 가 1111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에서 문숙(文肅)으로 고쳐졌다.

별무반

별무반 양성을 주도했고, 강력한 부족인 여진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어떻게든 9성을 사수해 냈으며 또 그 전쟁의 총지휘관이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더욱이 그 전설적 소드마스터 척준경을 발굴해 낸 인물도 바로 윤관이었다는 사실.

척준경

척준경이 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이를 살려준 인물이 윤관이다. 그래서 척준경은 윤관 휘하에서 윤관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분투했고,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행적을 보면 뛰어난 장군이라기 보다는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지도력과 굳은 의지가 장기인 '뚝심형 리더'의 인상이 더 강해 보인다. 말하자면 '프로젝트 기획자'형 스타일. 하지만 전쟁 초기에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일거에 9성을 점거한 작전에서 윤관이 보여준 전략적 안목은 상당한 것이었다. 고려사 말미에는 "젊어서 부터 학문에 힘써 전장에서도 경서를 휴대했고, 어진이와 착한 것을 좋아함이 당대 최고였다."고 윤관을 평가하고 있다. 북방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말년에 출세했어도 그것을 누려보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 손자인 윤인첨도 재상직에 올랐고, 윤관 이후 파평 윤씨는 일약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윤관 장군 묘

윤관 장군 동상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공원에 윤관 장군의 동상이 있다. 이 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위와 같은 장군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윤관 장군이다. 이 동상은 1979년에 건립 되었다고 한다. 그외 상무대에도 윤관 장군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