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1. 세파의 연원 통상 명문가를 선정하는 기준은 신라조와 고려조와 조선조를 아울러 주요 고위 관직에 봉사한 선조, 과거에 급제한 선조, 공신록에 등재된 선조, 임금의 묘당에 배향된 선조, 왕실과의 혼맥 관계, 학문의 문파를 이룬 선조 등등 다양한 판단 기준에 어느 수준에서 부합되는 가를 고려해 판단한다. 이러한 모든 기준에서 우리 파평 윤문은 어느 하나에도 부족함이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 임은 자타의 이론이 없고 이러한 결과로 사람들은 우리 윤문을 일컫어 삼한갑족의 하나로 칭하는데도 이론이 없다. 우리 파평윤문은 태사공 휘 신달을 그 시조로하여 구구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종파가 존재하며 그중 15세 휘 곤을 중시조로 하는 소정공파의 후손들이 가장 번성하여 다수의 지파를 이루게 된다. 우리가계는 소정공은 조선조 2대왕인 이방원과 어려서 동문수학한 걸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비록 조선의 건국과 이방원이 주도한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이방원의 편에서 깊숙히 관여하였으나 아들분들의 휘를 중국 수양산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빌려 희이, 희제, 삼산으로 한 것으로 추론해볼때 절개와 지조를 지닌 분이셨음을 알수 있다. 실제 장자인 휘 희이에게는 조선조에서 높은 벼슬에 봉사하지 말것을 유훈으로 남겼고 휘 희이께서는 실제로 부친의 휴훈에 따라 그 후손들과 함께 낙향하여 23세손에 이르렀을 때 절손되 휘 희제 후손인 24세 휘 비경께서 종사를 봉사케 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소정공파의 종중은 차자인 휘 희제(한성공)으로 계승된다 할 것이다. 한성공께서는 5남3녀를 두셨는데 장자인 휘경의 아드님이신 18세 영의정 휘 필상이 갑자사화에 연산군에 의해 사사(실제로는 자진하신거로 알려짐)되셨으나 중종반정때 신원되시는 고난이 있었다. 한성공의 차남인 휘 은께서는 슬하에 9남2녀를 두셨는데 9분의 후예들이 특별히 번창하여 이분들을 중시조로 파평윤문 소정공9방파를 이루게 된다. 우리가계는 소정공9방파중 6방인 통례공 휘 사하의 후손들이다. 통례공은 파주인근(현재의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일원)에 세가를 이루어 거의 대부분의 선영이 보첩에 의하면 연천군 백의리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은 통례공 이하 6기의 묘역만이 공원으로 조성되 연천군의 주요 사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통례공께서는 휘하에 5남을 두셨는데 그중 5방인 휘탕은 상주목사를 지내셔서 후예들을 목사공파로 부르는 지파조이시다. 탕건을 최초로 제작한 발명가로도 알려져 계시며 손자되시는 휘 인함이 귀하게 되시었다. 목사공은 3남을 두셨는데 우리는 장자방인 휘 응벽의 후예들이며 2방인 휘 응벽은 대구 응벽정에 입향조로 후손들이 번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3방인 응성은 영천에 입향조라는 일설이 있으나 미상이다. 목사공의 장자방 휘 응규(증 이조판서, 세칭 판서공)는 슬하에 2난 2녀를 두셨으며 2방인 형조참판을지내신 휘 인함(참판공)이 4군자중 대나무 그림을 잘그리셨던걸로 알려져 있으며 그 호 또한 죽재이시며 죽재유고가 현재에 전한다. 우리의 직계조가 되신다. 이상에서 우리가계의 공식 파명은 파평윤문 소정공후 한성공후 통례공파 목사공분파 참판공지파가 된다. 2. 가계의 연원 지파조가 되시는 21세 형조참판 휘 인함께서는 3남3녀를 두셨는데 3방인 22세 휘 홍유께서 우리 계의 가계 종조가 되신다. 가계의 종조께서는 슬하에 3남1녀를 두셨고 그중 2방인 휘 유익께서는 4남1녀를 두셨고 그중 3방인 24세 종5품 종친부 전부를 지내신 휘 헌경이 우리의 직계가 되신다. 휘 헌경조에 이르러 보첩상 선영이 강화 통진으로 기재되 있는것으로 추론컨데 강화, 통진 인근으로 세거지를 옮긴것으로 판단되나 이후 까지도 선영이 포천군(지금의 연천군) 백의리 인근으로 기록되고 있어 우리 가계의 영정조 무렵까지 통례공파를 종가로 삼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연천에서 김포,강화에 이르는 지역의 명문세가로 자리하고 있었음도 명확하다. 휘 헌경조를 포함 이후 후예들에 이르면서 자손들이 귀하게 되어 25세에 이후 수많은 출계가 이루어 지게 되는 이러한 양자입적 관계가 4촌이상에서 연결되고 있어 실은 24세 헌경조이후 자손들은 보첩상 촌수와 관계없이 단일 일가에 준한다 할 것이다. 보첩을 보면 24세 휘 헌경조는 슬하에 4남을 두셨는데 장자방인 25세 휘명랑의 적손은 2방 휘 명은의 장자였던 휘 봉우가 출계한 것이며 휘 명은의 가계는 바로 다음 27세에 절손되어 다시 휘 봉우의 3자로 출계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출계 관계는 26세에서 27세를 거치면서 상당히 복잡할 정도로 서로 연결되어 24세 휘 헌경조에서 27세까지의 가계에서는 굳이 촌수관계로 근원간을 판단해서는 안될것이라 판단된다. 휘 헌경-명량(장자방)-봉우(장자방)-심경(2방)으로 이어지는 우리 가계의 직계조에서 27세 휘 심경이후의 문헌이 불비하다. 이는 계속되는 출계로 인해 보첩 정리에 어려움이 있었음에 기인한다 추측된다. 28세 휘 감 후조는 선영으로 추론컨데 그 세거지가 강화인근에서 옮겨져 왕십리의 입향조가 되신것으로판단된다. 이후 선영들은 실존되었지만 모두 구리인창, 전농동 부근임을 통해 이를 확인할수 있다. 28세 휘 감 후조 이후 31세 휘 용까지는 독자로 종사가 계승되었으며 우리가계는 31세 휘 용(자 영덕) 할아버님과 경주최씨 할머니를 공통의 직계조로 모시는 가계로 이하 가족이라 한다. 3. 가족의 연원 우리 가족의 세거지는 현재 서울 성동구 왕십리이다. 입향조는 28세 감후조 였던것으로 추측되다 입향의 이유에 대해 구전되고 정리된 것은 아직 없다. 이부분은 가족의 어른들의 말씀을 참고하여 정리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