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世 한성공 (漢城公) 파의 유래
소정공(昭靖公)의 둘째 아드님이신 휘(諱) 희재(希齊)께서는 고려 말 1380년 태어나 여말 1307년 제천감무(提川監務)에 제수되고 조선조에서 벼슬이 공조참의, 정헌대부 판한성부사(正憲大夫 判漢城府事,지금의 서울특별시장)에 이르고 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셨다. 공의 백씨는 휘(諱) 희이(希夷)로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나 아버지 소정공의 유훈을 받들어 더 이상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아버지가 돌아감에 전원으로 낙향하였고, 아우 휘(諱) 삼산(三山)은 벼슬이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지병조(知兵曹),첨추(僉樞)에 이르렀고 손녀께서 제9대 성종비(정현왕후)가 됨에 영의정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공의 배위는 남양 홍씨이시며 아드님에 휘(諱) 경(坰 : 白川公 - 배천공으로 부름), 휘(諱) 은(垠 : 參議公), 휘(諱) 증(增 : 副使公), 휘(諱) 배(培 : 掌令公), 휘(諱) 훈(壎 : 牧使公) 5형제를 두셨다
17世 참의공(參議公)파
한성공 (漢城公)의 차남이신 휘(諱) 은(垠 : 參議公)께서는 벼슬은 공조참의, 광주목사를 역임하고 제7대 세조 4년(1458) 광주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공께서는 슬하에 9형제를 두셨는데 차례로 휘(諱) 사로(師路,충(忠)景公). 휘(諱) 사석(師晳, 執義公), 휘(諱) 사유(師有,郡守公), 휘(諱) 사화(師華,別坐公), 휘(諱) 사공(師貢,司正公), 휘(諱) 사하(師夏,通禮公), 휘(諱) 사건(師騫,司直公), 휘(諱) 사연(師淵,護軍公), 휘(諱) 사맹(師孟,禦侮公)이시며 이분들을 일컫어 파평 윤문의 가장 번성한 9형제라는 의미에서 후대에서 구방 또는 구방파(九房派)라 칭하게 된다. 장자이신 충경공(忠景公)께서는 세종대왕의부마가 되신다.
18世 통례공(通禮公)파
참의공(參議公)의 6남이신 휘(諱) 사하(師夏,通禮公, 육방(六房))께서는 군자록사(軍資錄事)를 始作으로 여러 官職을 거쳐 忠勳府都事와 經歷을 지냈으며 外職으로 忠淸都事와 僉正副正을 지내고 品階가 正三品堂下官에 이르시었다. 소장공후 한성공파의 9방파중 통례공분파의 분파조가 되시며 분파조의 선영은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박석고개에 위치한 파평윤씨 청백공원에 조성되어있다. 슬하에 다섯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며 휘(諱) 렴,연,려,질,탕이시다
19世 목사공(목사公)파
통례공(通禮公)의 5남이신 휘(諱) 탕(宕)께서는 1504년(연산군10) 식년시 문과 복시에 합격하셨으나 성종때 발생한 폐비윤씨 사건에 연류되 사사된 윤필상(尹弼商)의 오촌 조카였다는 이유로 연좌되 지방에 정배되었다가 중종 반정이후인 1507년(중종2) 증광시에 병과3위로 문과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여 봉상사주부(奉常寺主簿), 형조좌랑(刑曹佐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경상도지사(慶尙道都事),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상주목사(尙州牧使)등의 관직을 역임하셨다. 1513년(중종 8) 문종의 비 顯德王后(단종의 생모) 權氏의 복위를 주장하셨으며, 탕건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슬하에 휘(諱) 응규(판서공),응벽 두 아드님을 두셨다.
20世 판서공(판서공파)
판서공은 목사공의 장자이시며 휘(諱) 응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