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겸전의 혈통


文武兼全[문무겸전]의 血統[혈통]

大提學[대제학] 徐居正[서거정]선생은 鈴川府院君[영천부원군]의 神道碑文[신도비문]에서 文肅公[문숙공]이 「文武全才[문무전재]」를 갖추시고 「出入將相[출입장상]」하시어 여진을 정복하시고 先春嶺[선춘영]에 정계비를 세우시어 「拓地開疆[척지개강]」의 偉功[위공]을 이룩하시었다고 하였다. 문과에 장원하시어 文名[문명]을 떨치시고 또한 명장으로서 청사에 빛나는 위업을 완수하신 우리 文肅公[문숙공]이야 말로 文武兼全[문무겸전]의 으뜸가는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文肅公[문숙공]은 항상 손에서 책이 떠나갈 사이가 없으셨으며 삼천만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신 진중에서도 언제나 四書五經[사서오경]을 휴대하시었다고 하니 공이 얼마나 학문을 좋아하시었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여기서 또한 우리가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文肅公[문숙공] 한 분의 후손 중에서 이조시대만 하더라도 400여명의 대과급제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文武兼全[문무겸전]의 귀감이 되는 국왕으로 우리는 世宗大王[세종대왕]을 서슴치 않고 들 수 있는데 대왕은 在世時[재세시]에 훈민정음 등 빛나는 문치를 베푸셨으나 항상 우리 文肅公[문숙공]의 위공을 대신들에게 상기시켰고, 나중에는 文肅公[문숙공]이 되찾은 바로 그 땅에 대왕자신이 六鎭[육진]을 개척, 북방의 國防[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힘을 쏟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우리 尹門[윤문]의 학문도덕을 돌이켜 보아도 어느 宗門[종문] 못지않게 빛나고 있다. 고려조 때에 文肅公[문숙공]과 文康公[문강공]이 특히 두드러진다. 국왕 앞에서 周易[주역]을 講論[강론]하는 金富軾[김부식]에게 文康公[문강공]이 어려운 문제에 관해 종횡으로 질문하니 金富軾[김부식]이 응답을 못하고 얼굴에 땀이 흘러 어찌할줄 몰랐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또한 文肅公[문숙공]과 文康公[문강공]은 일찍이 송나라 사신으로 가셨을 때 그 나라의 대학자 程伊川[정이천]선생과 시를 唱和[창화]하시고 易學[역학]을 강론하시었다고 하니 그 학문이 어느 경지에까지 오르시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고려 毅宗[의종]때의 禮部尙書[예부상서] 金子儀[김자의]가 撰[찬]한 文康公[문강공] 묘지에 의하면 文康公[문강공]을 당시 세인으로부터 「海東孔子[해동공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조에 들어와서도 文宗朝[문종조]의 대표적 학자이시며 太學[태학]의 師長[사장]으로서 儒門[유문]의 보루가 되시었던 平窩公[평와공](倬[탁]=昭靖公玄孫[소정공현손])이 계시며 공이 후진들에 根深末茂[근심말무]의 교훈을 주기 위해 심어 놓으신 은행나무 두 그루는 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성균관의 剪定[전정]에 우뚝 솓아 있어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퇴계도 일찍이 平窩公[평와공]에게 좀더 자세히 물어보지 못한 것을 평생 한스럽게 여겨왔다고 述懷[술회]한 바 있다. 평와공의 현손이신 八松文正公[팔송문정공](煌[황])은 牛溪[우계] 成渾[성혼]선생의 高弟[고제]이시자 壻郞[서랑]으로서 李朝性理學[이조성리학]의 정통가문을 이룩하시었고 八松公[팔송공]의 아드님 여덟 분은 세칭 「八擧[팔거]」로 알려진 분들로 그중에서는 네분(舜擧[순거],商擧[상거],文擧[문거],宣擧[선거])은 沙溪[사계], 滄浪[창랑], 睡隱[수은], 淸陰[청음], 愼獨齊[신독제] 등 當代巨儒[당대거유]들에 사사하여 열세에 문명이 높으시었다. 특히 魯西文敬公[노서문경공](宣擧[선거])은 道德文章[도덕문장]에 있어서 당대에 손꼽히는 巨儒[거유]이셨다. 八松公[팔송공]의 손자님이시며 魯西公[노서공]의 아드님이신 明齊文成公[명제문성공](拯[증])은 市南[시남], 炭翁[탄옹], 愼獨齊[신독제] 등 당대의 석학들에 사사하시었고 일생을 性理學硏究[성리학연구]에 전념하는데 있어서 퇴계이후 제일인이라는 稱辭[칭사]를 받으신 대학자가 되시어 학문도덕이 일세를 떨치어 隱逸[은일]로서 우의정까지 오르시어 白衣政丞[백의정승]이 되시었다. 또한 白湖公[백호공](鑴[효])는 書經[서경]연구에 매우 독창적인 학풍을 이루어 당대를 風靡[풍미]하시었고 禮訟[예송]문제로 尤庵[우암]을 통박한 대학자이었으며 나아가서는 北伐論[북벌론]을 주장하여 민족의 주체의지를 과세하시었다. 昇漢文獻公[승한문헌공](鳳九[봉구])은 遂菴權尙夏[수함권상하]에 사사하신 이른바 江門八學士[강문팔학사]중의 한분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님들께서는 문뿐만아니라 무에 있어서도 빛나는 공훈을 세우시어 거룩한 교훈을 남기시었다. 文肅公[문숙공]의 偉功[위공]은 고사하고라도 공의 아드님이신 御史公[어사공](彦純[언순])과 文康公[문강공]은 다같이 아버님의 여진정벌에 종군하시어 공을 세우셨고 특히 문강공은 西京[서경]에서 妙淸[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출정하시어 이를 토벌하시었다. 문강공이후 列先祖[열선조]께서도 대대로 문과급제하시면서도 외침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혹은 북으로 혹은 남으로 勇躍出戰[용약출전]하시어 위공을 세우시었다. 李朝[이조]에 들어와서도 成宗朝[성종조]의 建州女眞[건주여진] 討伐[토벌]때에 領相公[영상공](弼商[필상])이 西征元帥[서정원수]가 되시어 적을 쳐서 승리하시고 돌아오셨다. 그 후 壬辰倭亂[임진왜란]에도 僉使公[첨사공](興信[흥신])을 비롯한 많은 충신이 나오셨고 丙子胡亂[병자호란]때에는 忠貞公[충정공](集[집]) 및 忠憲公[충헌공](烇[전])을 비롯한 여러 선조님들이 순절하시었으며 가까이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에 일제 괴수들에게 철퇴를 내림으로써 조국광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신 梅軒尹奉吉義士[매헌윤봉길의사]의 위공을 또한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참으로 우리 尹門[윤문]의 血脈[혈맥]에는 文武兼全[문무겸전]의 으뜸가는 귀감이신 文肅公[문숙공]의 거룩하신 정신이 脈脈[맥맥]히 흐르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