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계통


南原 咸安尹氏

文肅公[문숙공]의 아드님 七兄弟分中[칠형제분중] 長曾孫[장증손] 碧松公[벽송공] (諱威[휘위])께서는 南原[남원]의 賊徒[적도]를 威德[위덕]으로서 平定[평정]하신 功[공]이 있어서 南原伯[남원백]이 되시고 南原[남원]으로 賜本[사본]까지 받으신 後[후] 公[공]의 孫子[손자] (諱[휘] 敦[돈])께서는 또 咸安[함안] 頑賊[완적] 平定[평정]하신 功[공]으로써 咸安伯[함안백]이 되시고 長子[장자]의 後孫[후손]은 咸安[함안] 爲貫[위관]하셨다.

이와같이 祖孫間[조손간]이 再次[재차]의 授本[수본]을 당하게 된 咸安伯[함안백]께서는 다행이 아드님 四兄弟[사형제]를 두신 關係[관계]로 長子[장자](諱希甫[휘희보])만을 咸安本[함안본]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다음 三兄弟[삼형제]는 自然[자연] 南原本[남원본]을 繼承[계승]하게 되어서 各其[각기] 分派[분파]됨에 이르렀다.

今般[금반]에 兩波[양파]는 合譜案[합보안]에 贊同[찬동]함으로써 同譜[동보]하였음.


德山尹氏[덕산이씨]

德山君[덕산군]은 自始祖九世[자시조구세]

文肅公[문숙공]의 第五子[제오자]는 僕射公[복사공](諱彦植[휘언식])의 曾孫[증손](諱殷衡[휘은형])께서는 國歌[국가]에 大功[대공]이 있어서 德山君[덕산군]이 되시고 後孫[후손]이 德山[덕산]으로 爲貫[위관]하였다.

그 後孫[후손]에 嶺南[영남] 巨儒[거유]로 有名[유명]하신 主薄公[주박공](諱寬[휘관])께서는 坡平[파평]과 合譜[합보]할 意圖[의도]로서 原稿[원고]까지 作成[작성]하였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셨고 또 至今[지금]으로부터 九十年前[90년전]에 永㿼[영연], 永殷[영은] 兩人[양인]은 坡平[파평]에 鈴平君[영평군] 行直台[행직태]를 찾아서 相互[상호]의 族譜[족보]를 對照[대조]한 後[후] 同譜[동보]에 合意[합의]는 보았으나 역시 實踐[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今般[금반]에 完全[완전]히 合譜[합보]하였음.


坡平尹氏

太師公[태사공]의 第六世[제육세]이신 文康公[문강공](諱彦頣[휘언신])께서는 寶文閣[보문각] 學士[학사]로 계실 때 僧徒[승도] 妙淸[묘청]의 西京[서경] 叛亂[반란]을 當[당]하여 金富軾[김부식]과 같이 이를 討平[토평]하신 功[공]이 컸으나 金富軾[김부식]의 陰害[음해]로 梁山防禦使[양산방어사]로 左遷[좌천]되셨다가 六年[육년]만에 廣州[광주]留守[유수]로 轉任[전임]되시면서 自辨疏[자변소]를 올리매 王[왕]이 大悟[대오]하시고 政堂文學[정당문학]으로 올리신 바 되었으나 公[공]께서는 老病[노병]을 憑藉[빙자]하시고 退任[퇴임]하신 後[후] 主[주]로 坡平山[파평산] 金剛寺[금강사]의 貫乘大師[관승대사]와 空門友[공문우]가 되시어 金剛居士[금강거사]라 自號[자호]하시고 坡平山上[파평산상]에 있는 太師公[태사공]의 所築[소축]인 馳馬䑓[치마대]와 熊潭里[웅담리]에 있는 文庸公[문용공]의 釣䑓[조대]를 保守[보수]하시는 등의 爲先[위선]으로 餘生[여생]을 마치셨다. 坡平爲貫[파평위관]은 太師公[태사공]께서 坡平山下[파평산하]에서 化生[화생]함으로써 爲貫[위관]한다.


新寧尹氏[신녕윤씨]

花山君은 自始祖八世

文肅公[문숙공]의 二子[이자] 博士公[박사공](諱子固[휘자고])의 子[자](諱仁直[휘인직])께서는 西京[서경] 趙位寵[조위총]의 반란을 討平[토평]하신 공으로 封爵[봉작]을 받으시고 子孫[자손]이 以因爲貫[이인위관]하다. (花山[화산]은 新寧[신녕]의 古號[고호])

兩家[양가]의 譜系[보계]가 符合[부합]됨으로써 合譜[합보]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