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王世紀[제왕세기]에 의하면 三皇[삼황]중의 일인인 黃帝[황제](:복희씨,신농씨와 더불어 삼황이라 부름)의 아들인 少昊金天氏[소호금천씨]가 그의 차비 소생자 般[반]을 弓正[궁정]으로 삼고 雍州[옹주]의 尹城[윤성]을 봉하였는데 그 후손이 윤성의 윤자를 따서 성으로 삼으니 이로서 尹姓[윤성]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일설에는 고대중국의 재상이라는 뜻을 가진 卿尹[경윤]의 윤자를 따서 윤성이 되었다고도 한다.
萬姓統譜[만성통보]에 의하면 堯[요]의 후손이 范[범], 尹[윤], 唐[당], 韋[위], 劉[유]의 오성으로 분파되었다고 하며 金榮川[김영천] 百鍊記[백련기]에 따르면 伊尹[이윤]의 자손이 伊[이], 莘[신]. 尹[윤], 衡[형]의 사성으로 분파되었는데 그중에서 윤씨만이 가장 뚜렷한 성씨로 史記[사기]에 남아 있다.
詩傳[시전], 孟子[맹자], 莊子[장자] 및 史記[사기]에 尹姓[윤성]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의 윤성의 연원이 매우 悠遠[유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堯舜時[요순시]에는 尹壽[윤수]라는 명인이 堯舜之師[요순지사]로 알려져 있고 殷湯時[은탕시]에는 尹諎[윤책]라는 인물이 있었으며 주나라 사람으로는 尹吉甫[윤길보]라는 賢臣[현신]이 있었고 이밖에 맹자, 사기에는 尹士[윤사], 尹公之他[윤공지타], 尹薺[윤제] 및 尹僠[윤번] 등의 인물의 이름이 나온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중에는 尹文[윤문]과 尹喜[윤희]의 두 학자가 있는데 이 두 학자는 모두 노장사상을 이어받거나 이에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 文肅公[문숙공]의 자(同玄[동현])와 호(黙齊[묵제])가 노자철학과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문숙공의 자인 「同玄[동현]」은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玄同[현동]」이라는 문귀를 상하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玄同[현동]」이란 자기의 재능이나 지력을 내세우지 않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하나로 어울린다는 뜻이다. 또 문숙공의 호 「黙齊[묵제]」를 보더라도 도덕경에 「不言之敎[불언지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성인은 무위의 세계에 몸을 담고, 가르침을 주는 때에도 묵묵한 가운데 말로서 일일이 표현하지 않는다는 노자의 불언지교를 연상케 한다. 국가에 대공을 세우셨음에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으시고 간신배에 현혹된 왕명에 순종하신 문숙공의 天稟[천품]이 공의 자와 호를 통해서도 나타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윤성을 살펴보면 우리 시조이신 太師公[태사공](諱[휘] 莘達[신달])만이 신라말기로부터 고려초에 걸쳐 이나라 정사에 뚜렷한 사적과 공훈을 남기신 두드러진 위인으로 나타나있으시다.
신라말기에는 태사공 이외에도 윤성을 지닌 몇몇 인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고려사에 등장하나 고려태조로부터 벽상삼한익찬공신호를 받으시고 삼중태광태사라는 관직에 오르시어 직제상 최고의 예우를 받으신 분은 오직 우리 태사공 한분이시다.
태사공께서 득성하신 연유에 관해서는 예부터 종중에 전해오는 譜牒[보첩] 및 그밖의 문헌에 의하면 태사공께서는 신라 진성왕칠년(서기893)음력8월15일 파주 파평산 아래 용연에 떠 오른 玉函[옥함]에서 나오시었는데 그 옥함을 건져낸 윤씨 노파의 성을 따라 윤성이 되었다고 전하나 또 다른 문헌에 따르면 옥함 자체에 윤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윤성이 되시었다고도 하며, 또한 옥함에서 나오실 때 그 어른의 손바닥에 윤이라는 글씨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고도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尹邠[윤빈]이라는 인명이 보이고 삼국유사에는 尹卿[윤경]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은 신라말에 고려태조와 싸워 패한 후백제의 무인으로 되어 있다.
후삼국동란기의 인물로는 또 尹瑄[윤선], 尹逢[윤봉] 및 尹全[윤전] 등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윤선은 처음 궁예의 將[장]으로 있었으나 배하와 군졸을 이끌고 북변으로 도망갔다가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고려로 돌아왔다. 윤봉은 고려태조의 공신으로 관이 내사령까지 이르렀고, 윤전은 泰封[태봉]의 군인이었으나 無實[무실]의 죄로 궁예에게 잡히었다가 태조에 의해서 구출되었다고 전한다.
이밖에도 윤성을 가진 신라말의 인물들이 야사 또는 몇몇 성씨의 家乘[가승]에 등장하고 있으나 정사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윤성을 지닌 신라말기의 다른 인물들이 거의 당대에 그치고 그 후손이 알려져 있지 않는 것과는 달리 태사공께서는 우리 宗門[종문]의 鼻祖[비조]가 되시어 繼繼承承[계계승승] 天有餘年[천유여년]에 걸쳐 한결같이 빛나는 遺芳[유방]을 남기시어 대대로 名公巨卿[명공거경] 大儒碩學[대유석학]을 배출하시고 오늘날 백만에 달하는 동방의 일대 거족을 이루게 하시었으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