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파평 윤씨는 고려(高麗) 태사(太師) 휘(諱) 신달(莘達)을 비조(鼻祖)로 한다. 공께서 출생하실 때, 영묘하고 이상한 행적이 있었다. 가첩(家牒 : 족보)을 보면 파주의 파평산 서쪽 기슭 아래에 큰 연못이 있으니 이르기를 용연이라 하는데, 당나라 소종 경복 2년 계축년 8월 15일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가 우레가 치고 구름이 일어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돌 상자가 용연에서 떠올랐다. 태수께서 이를 듣고 이상히 여겨 용연으로 가서 본 즉 상자가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시골 할머니가 연못 가장자리에서 옷을 빨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어 상자가 다시 떠올라왔다. 할머니가 상자를 열어보니 오색의 찬란한 깃털 속에 한 갓난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양쪽 어깨에는 붉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해와 달 같았고, 좌우 갈비뼈 아래에 81개의 비늘이 있었고, 발에는 7개의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얌은 마치 북두칠성을 수놓은 것 같았다. 손에는 윤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이내 아이를 보호하고 기르니 점차 자라매 용모가 장대하고 훌륭하며 재주와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너 인연으로 파평산 아래에 자리잡고 살았는데 마침내 신마(神馬)를 얻어서 산언덕 위를 마치 나는 듯 달렸다. 개경에 조참(朝參)하기 위하여 이 말을 달려 강을 건너는데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로써 후세에 사람들은 그 언덕을 치마대라 불렀으며, 그 나루터를 물결을 끊고 마시듯 강을 건넜다 하여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지었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니 그 공훈으로 벽상익찬공신(壁上翊贊功臣)으로 책훈되고 관직이 삼중대광태사로 올랐다. 일찍이 왕께 덕을 닦고 이를 행하기를 권하니 왕께서는 가상하게 생각하셔 시신에게 이르기를 “신라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공의 공이로다.”라고 하였다. 공이 81세 되시던 해에 동경 유수로 재임 중에 돌아가시니 동경의 기계현 벌치동 구봉산 유좌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다. 때는 바로 송 태조 개보 6년 계유년이다. 1,000여 년의 세월이 구름과 같이 흘렀도다. 앞으로 공의 행적은 만 억년 동안 뻗치리라. 이름을 빛내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대성으로 칭하니 이것은 어찌 공께서 닦으신 기운이 오랫동안 후손에게 물려지고, 후손들이 이를 받들어 그 공을 크게 선양한 연유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무릇 사람이 정기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나 일은 경사에서 간간이 찾아 볼 수 있는 일로써 이는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일이로다. 우리 윤씨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일은 더욱 확연하여 세상에 귀로써 듣고 전하여 온 지가 오래도다. 자손된 자 어찌 이 행적을 인멸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이를 크게 선양하여 표창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모든 종친이 서로 의논하여 비를 세워 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장하도다. 공이 탄생하신 지 1028년이 지난 경신(庚申)년 4월에 후손 상건(相健)이 재력(財力)을 내어 그 일을 관장하여 시영(是永)에게 그 일을 감독하기를 부탁하고, 스스로 글을 가지고 상익에게 달려가 지을 것을 삼가 부탁하니 그 대략은 위와 같으니,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도모함이다. 31대손 가선대부 전 행 사간원 대사간 상익(相翊)은 삼가 지음 30대손 자헌대부 전 행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조영(祖榮)은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