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 약사


우리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붕괴(崩壞)되고 후삼국(後三國)의 혼란기(混亂期)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再統一)되는 역사적(歷史的)인 일대 변역기에 탄강(誕降)하시어 마침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위인(偉人)이시다.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 동료(同僚)들과 협력(協力)하여 궁예(弓裔)를 무찌르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推戴)하여 백성(百姓)의 호응(呼應)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新羅)는 귀족사회(貴族社會)의 부패(腐敗)와 국왕(國王)의 난정(亂政)으로 도처(到處)에 도적(盜賊)이 횡행(橫行)하여 각지(各地)에서 토호(土豪)들이 반란(反亂)을 일으키는 등 동난기의 와중에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新羅)는 국력(國力)이 극도로 쇠퇴하고 각처에서 군벌(軍閥)이 봉기하여 궁예(弓裔)가 송도<개성>(松都<開城>)에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建國)하고 강원도(江原道), 항해도(黃海道) 및 평안도(平安道)까지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弓裔)는 그 후 철원(鐵原)으로 국도(國都)를 옮기고 있었는데 왕건(王建)은 그 휘하에서 대장(大將)으로 있었고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왕건(王建)의 동료(同僚)이셨다. 궁예(弓裔)는 천성이 잔인 횡포하여 폭정과 학살을 자행하여 민심이 완전히 이탈되었기 때문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제장(諸將)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물리치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때 궁예(弓裔)는 궁중(宮中)에서 주색(酒色)에 잠겨 있다가 왕건(王建)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건(王建)과 윤신달(尹莘達)이 쳐들어온다니 나는 이제 끝났다』하면서 궁중(宮中)을 빠져나가 도망치다가 강원도(江原道) 평강(平康) 산골에서 백성(百姓)들에게 피살(被殺)되었다.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등극(登極)과 동시에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고치고 송도<개성>(松都<開城>)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그 뒤에 신라(新羅)를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수차 정벌한 사실이 있었는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때마다 왕건(王建) 태조(太祖)와 같이 출정하셨던 것이다. 왕건(王建) 태조(太祖)가 고려(高麗) 건국(建國)한 뒤 18년이 지난 서기 935년에 신라(新羅)의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傳)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태자(太子) 이하 신하(臣下)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려(高麗) 왕건(王建) 태조(太祖)에게 나라를 바치고 투항(投降)하였다.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투항(投降)하여 온 경순왕(敬順王)에게 왕녀(王女)를 하가(下嫁)시켜 별궁(別宮)에 거주(居住)케 하면서 백관(百官)의 상위(上位)로 우대하였다. 그때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서라벌에 동경<경주>대도독부(東京<慶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대도독(大都督)으로 하여금 신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 다음해에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끝까지 반항(反抗)하는 후백제(後百濟) 신검(神劍)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 드디어 삼국(三國)을 다시 통일(統一)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고려(高麗) 태조(太祖) 19년(936)의 일이었다. 왕건(王建) 태조(太祖)가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하기까지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항상 왕건(王建)에 대하여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백성을 다스려 천하(天下)를 이롭게 해야 합니다』라고 충간(忠諫)하였는데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그 충간(忠諫)을 감명 깊게 받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조회석상(朝會席上)에서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중신(衆臣)들에 대하여 『이 대업(大業)을 이룬 데는 윤신달(尹莘達)의 공(功)이 크다』고 유시(諭示)하였던 것이다. 그 때 공신(功臣)으로 1등이 5명, 2등이 12명, 3등이 10명, 4등이 2명으로 모두 29명이 책훈되었는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2등공신(二等功臣)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官爵)을 받으셨다. 태사(太師)라는 관작(官爵)은 태부(太傳) 태보(太保)와 더불어 3공(三公)의 예후(禮遇)를 받는 직위(職位)였다. 이때 같이 공신(功臣)으로 책훈(策勳)된 인물 중(人物 中)에는 신숭겸<평산신씨시조>(申崇謙<平山申氏始祖>) 배현경<경주배씨시조>(裵玄慶<慶州裵氏始祖>) 홍유<의성홍씨시조><洪儒<義城洪氏始祖>) 복지겸<면천복씨시조>(卜智謙<沔川卜氏始祖>) 김선평<신안동김씨시조>(金宣平<新安東金氏始祖>) 류차달<문화류씨시조>(柳車達<文化柳氏始祖>) 이도<전주이씨시조>(李棹<全義李氏始祖>) 장길<안동장씨시조>(張吉<安東張氏始祖>) 등이 있다. 공(公)의 휘(諱)는 신달(莘達)이요 일휘(一諱)는 화신이시며 시호(諡號)는 소양(昭襄)이시다.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癸丑) 음력(陰曆) 8월15일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 아래 용연(龍淵)에서 탄강(誕降)하시었다. 공(公)께서 파평산(坡平山)과 용연(龍淵) 부근에서 성장하심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니시게 되고 재기(才器)가 뛰어나시어 날로 영특한 자품(姿品)을 갖추시게 되었다. 공(公)께서는 자라나시면서 학문(學問)을 익히시고 또 파평산(坡平山)에 올라가 무술(武術)을 연마하신 후 성년(成年)이 되시면서 어느 재상댁(宰相宅)에 문객(門客)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 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國王)으로부터 그 재상(宰相)에게 제문(祭文)을 지으라는 왕명(王命)이 내려졌다. 그 재상(宰相)이 자택(自宅)에 돌아와서 제문(祭文)을 지으려 하였으나 머리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태사공(太師公)께서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하시면서 의군신지유죄감수재앙(宜君臣之有罪甘受災殃) 해초목지무지등몽초열(奚草木之無知等蒙焦熱)이라고 써서 재상(宰相)에게 제시하시자 재상(宰相)은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名文)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제문(祭文)을 지어 국왕(國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글 뜻은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다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 무지한 초목까지 타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었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 재상(宰相)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官職)에 오르시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文獻)은 없다. 고려(高麗) 건국(建國) 후 25년만인 서기 943년에 왕건(王建) 태조(太祖)가 승하하고 제2대의 혜종(惠宗)이 등극하였다. 원래 동경<경주>대도독부(東京<慶州>大都督府)와 서경<평양>대도독부(西京<平壤>大都督府)에는 가장 신망(信望)이 높은 중신(重臣)을 보냈던 것인데 혜종(惠宗)은 등극과 동시에 안심(安心)이 되지 않았던지 서경대도독부사(西京大都督府使)에는 가까운 왕족(王族)을 보냈고 동경대도독부(東京大都督府)에는 태사공(太師公)을 보냈다. 그때 태사공(太師公)의 보령(寶齡)은 52세였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동경(東京)으로 부임하시었으나 한편 아드님이신 功臣公(諱先之)께서는 종신(終身)토록 송경(松京)을 떠나지 못하셨다. 그 이유는 중국(中國)에서 천자(天子)가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제후공(諸侯王)(오늘의 총독<總督>)을 봉하는 때에는 아무리 신임(信任)하는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제후왕(諸侯王)의 장자(長子)를 볼모로 왕경(王京)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일에 근거한다. 따라서 혜종(惠宗)도 그렇게 신임(信任)하는 분을 보내면서도 신라(新羅)의 유민(遺民)이 많았기 때문에 만일(萬一)을 염려하여 공신공(功臣公)을 송경(松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태사공(太師公)께서 동경(東京)으로 부임하셔서 30년간 재임하시다가 81세에 서거하셨는데 그간에 부자(父子)분께서는 한번도 상면(相面)하실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고려(高麗)에 바칠때 태자<마의태자>(太子<麻衣太子>)와 중신(重臣)들이 크게 반대하였던 것이므로 신라(新羅) 백성(百姓) 中에도 원래가 적대시 하였던 고려에 대하여 불복(不服)하고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기타 어느 문헌(文獻)에도 신라(新羅) 유민(遺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기(史記)가 전혀 없다 그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태사공(太師公)께서 대도독(大都督)으로 부임하셔서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통치함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왕도정치(王道政治) 즉 도의정치(道義政治)를 베푸셨는지 그 선정(善政)의 정도를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조정(朝廷)에서도 30년이나 유임시킨 것도 태사공(太師公)의 통치가 목민(牧民) 위주의 정치였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태사공(太師公)의 묘소(墓所)가 실전되었다가 여러 百年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地方民)들로부터 그곳은 윤능골(尹陵谷)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新羅) 유민(遺民)들이 태사공(太師公)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東京)에 머무시어 30년 동안이나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에 충성된 백성(百姓)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公)이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는 폐지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맡기고 경주(慶州) 일개군(一個郡)만 다스리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공(公)이 고려(高麗) 광종(光宗) 24년 계유(癸酉973)에 주소(任所)에서 서거(逝去)하시니 향년(享年) 81세이셨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경주(慶州) 기계현(杞溪懸) 벌치동(伐治洞)(현 포항시 기계면 봉계동<現 浦項市 杞溪面 鳳溪洞>) 운주산(雲柱山) 구봉산(九峯山) 아래 서원(西原)에 모시었는데 중간(中間)에 실전(失傳)되었다가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1737)에 후손(後孫) 봉정공(鳳廷公)이 본부영장(本府營將)이 되어 대부윤(大夫尹)이라는 비(碑)돌조각을 얻었으나 확정을 짓지 못하다가 영조(英祖) 15년 기미(己未)(1739)에 익헌공<휘 양래>(翼獻公<諱 陽來>)께서 본도(本道)에 부임하시어 더욱 확증을 얻어서 심묘(尋墓)하여 개봉축(改封築)하고 영조(英祖) 16년에 입비(立碑)하였다. 배위(配位) 묘소(墓所)에 관해서는 봉강재(鳳岡齊) 소장(所藏)의 태사공(太師公) 심묘기(尋墓記)에 경주(慶州) 남면(南面) 봉동산(鳳洞山) 아래 박달리(朴達里) 감용자좌오향득수진파(坎龍子坐午向得水辰破) 동서분(東西墳)으로 모시고 비석을 묘 아래에 묻었다고 전(傳)하나 태사공(太師公) 묘표기(墓表記) 및 묘지(墓誌)에는 합장(合葬)되시었다는 기록이 있어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