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니시비


회니시비(懷尼是非)

당시에 송시열은 지금의 대전 신탄진 부근인 회덕(懷德)에, 윤증은 충남 논산의 니산(泥山)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회니논쟁”이라 한다. 논쟁의 전말은 간단치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수월하지 않다. 논쟁은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되었던 윤휴와의 친분 관계로부터 비롯되어 병자호란 당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을 둘러싸고 심화되었다. 윤선거는 송시열로 대표되는 당대 주류 성리학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던 윤휴를 높이 평가했는데 이것이 송시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윤선거가 전란 당시 강화도에서 혼자만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한 것을 두고 송시열 측이 이를 원칙적으로 비난하면서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급기야 윤선거가 죽고 나서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이 그의 묘비명을 지극히 성의없이 쓰게 되면서 한 때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에 이어 평생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윤증의 처신은 그러한 아픈 내력의 결과가 아닐지.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을 지나며 조선 정계는 붕당정치에 휩싸인다. 붕당은 조선 중엽에 모습을 드러내 세도정치가 등장한 조선 말까지 이어지며 조선정국을 파탄으로 까지 몰고 가고 필경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조선 초기 붕당사에서 정철(精鐵), 율곡(栗谷), 성흔(成混)문하의 제자들로 형성된 기호학파(경기,호서지방)를 나중에 서인이라 했고, 퇴계(退溪), 남명(南冥), 화담(花潭)문하의 제자들로 구성된 영남학파를 나중에 동인이라 했는데 동인은 정여립(鄭汝立)사건이후 남명계열의 북인, 퇴계계열의 남인으로 갈라진다. 북인은 선조말 광해군 때 잠깐 영수 정인홍 등이 임진왜란 직후 승기를 잡았지만 광해군의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위 사건'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누어지며 소멸되고 만다. 애초 붕당정치로 정국 주도권을 잡은 건 동인이었으며 이것은 임진왜란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이때에 중요한 사건이 서자들이 문경새제에서 자신들을 죽림칠현이라고 서로 약조하며 지냈는데 이때에 허적가문의 서자로 인해서 북인들의 몰락을 가져 온다. 그러나 광해군을 폐위한 김자점, 이귀, 최명길등의 인조반정을 거치며 서인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정국은 남인과 서인으로 양분되고 남인은 왕권중심주의, 서인은 신권중심주의로서 예송논쟁을 통해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인다. 서인은 주자학외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학문경향이고 남인은 시원유학(천주사상)을 중시하며 주자학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학풍이었다. 서인이 천주교 탄압에 앞장서고 남인 윤휴의 자율적 유학경전 해석을 사문의 난적이라 매도한 것은 서인들이 절대적 주자학의 신봉자이며 중화 사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약용(丁若鏞)의 ‘천주는 상제이시다’의 사상은 남인의 최수운 선생의 동학에서 신상사상으로 이어진다. 남인과 소론은 정치적 야당인데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사상가,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다. 서인은 정치적 여당으로서 조선말 세도정치의 본거지로서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친일파로 변신한다. 기호학파(畿湖學派)-서인-노론은 조선의 문화중흥을 이끈 주역이면서 조선을 망친 주역이기도 하다.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과의 논쟁의 과정을 보면, 1683년 숙종9년 서인이 젊은 소장층인 소론과 원로 노장층인 노론으로 분열되며 약 100여 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해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 그 중심엔 송시열과 윤증이 있다. 윤증(尹拯)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은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서인이면서 대립갈등을 하게 된 경위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던 윤선거의 가족은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난을 맞는데, 청군이 밀려오자 윤선거의 아내는 겁탈을 피해 자결하고 윤선거는 평민으로 변장 후 혼자서 살아 나왔다. 윤선거는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온 나라가 척화를 외치며 청군에 항전하였는데 혼자 성문을 빠져나온 것은 명분을 중시하는 사대부 사회에서 큰 오점을 남겼다. 이로써 윤선거는 벼슬길을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우던 윤휴(尹鑴)와 깊은 친분을 맺는다. 윤휴는 주자학의 원칙만을 고집하던 송시열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원시유학(주자학이 아닌 시원경전)의 중요성을 역설한 인물이었다. 우암 송시열은 죽어서도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붓으로 천하를 휘어잡은 독특한 정치인이다.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을 인용하면 부관참시 할 정도로 그의 권세는 대단하였다. 선조 40년(1607)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일곱 살 이 되어선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썼다고 한다. 여덟 살 에 송이창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회덕 삼송의 하나인 송준길을 만난다. 두 사람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낸다. 사계 김장생과 김집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교류를 하며 당대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는 기회로 성장한다. 송시열은 병자호란의 패배속에서 봉림대군 이었던 효종의 북벌계획이 탄로나는 사실이 발각되어지며 조정과 재야를 넘나들던 중 근 20년 가까이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발단은 백호 윤휴의 경전해석. 윤휴가 〈중용〉에 대해 집 주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예송논쟁으로 이어지며 극에 달하였고, 윤휴는 숙종 6년 허적의 서자 허견의 모반사건에 연루돼 사약을 받았다. 송시열과 윤휴는 당대 성리학의 대가들로서 청을 공격하자는 북벌에 대한 대의는 뜻이 같았으나 유교 경전의 해석에 관해서는 송시열은 불가(不可)하다 하였고 윤휴는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체적인 시각으로 주해를 달며 재해석 하려 했던것 같다. 그런데 유교 경전 해석에 관해서는 입장이 상반되었고, 정통성에 입각하였던 송시열과는 등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윤선거는 송시열과 달리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보며 가능하다 하였다. 오직 주자해석만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윤리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행보였다. 윤휴와 송시열의 입장 차이는 효종 4년 황산서원에서 벌어진 시회(詩會) 토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러한 앙금이 남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시열의 자존감은 대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일이 있은 후 윤선거는 송시열과 나쁜 감정을 안은 채 사망했다. 윤증은 송시열의 문인이었는데.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과거에는 부친이 돌아가시면 시묘가 끝나고 묘비명을 부탁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묘갈명을 쓰는 것을 마땅히 생각하지 않았지만 단호 하게 거절할 수는 없는지라 좋게 지어 말하지 않고 남들이 내용 그대로를 성의없이 대충 작성하여 전달하였다. 부친에 대한 불만족스런 묘갈명을 받은 윤증은 3년간 여러 차례 걸쳐 묘갈명의 내용을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성의가 없었다. 또한 그의 문집에서 강화도 사건에 대해 윤선거를 험하게 몰아붙였다. “수치를 모르고서 말꼴을 먹고는 뻔뻔스럽게 다시 와서 호탕하게 노는구나, 청류를 향해 옷소매를 빨지 마소, 때 묻은 옷소매에 청류 더럽힐까 두렵소” 이글을 읽은 윤증은 송시열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은 두 사람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져 서인을 노론·소론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됐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며 성장하였고, 이후에 장헌세자 -사도세자-의 평양원유사건을 계기로 부풀려진 상태에서 시파와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된다. 소론은 이전 박세체. 이경석. 윤휴. 박세당. 최석정등의 문사들과 통맥하며 유지하는데. 병자호란이 끝나고 이경석이 현재 서울의 잠실에 있는 '청태종신도비문'을 작성하였다고 하여 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 하여 또 다시 공격함으로 이경석이 유배되어 영의정으로서 자신의 죄가 크다 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백마산성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는 등의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찌 보면 노론과 소론의 분쟁은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에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노론은 송나라의 성리학을 받들면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명분을 세웠지만, 실상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만의 철학이었는지도 모른다. ▲논쟁을 통해 불거진 노론·소론 파당 불씨 명재 윤증은 인조 7년(1629)에 태어났기 때문에 송시열보다 22세 아래다.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유계와 송준길,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윤휴·윤선도 등 남인계 석학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양명학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송시열 문하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조정으로 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으나 한사코 뿌리쳤다. 소론 영수로 나선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은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불린다. 송시열이 대전 시내의 동쪽에 자리한 회덕에 살았고, 윤증이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이성)니성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다.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예송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윤선거 부자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고 돌자 병자호란 당시의 강도(江都) 수난과 탈출 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시작됐다. 송시열 주장에 따르면,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뒤 성을 사수하기로 약속했다. 친구인 권순장과 김익겸, 이돈오 등은 성이 청나라 군사에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죽었고, 윤선거의 처도 자결했다. 오직 윤선거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더구나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봉림대군 사신 일행이 성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한 뒤 돌아가는 사신 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윤선거·윤증의 주장은 다르다. 윤선거에 따르면, 권순장과 김익겸은 남문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이 분신자살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으며, 자신의 처가 죽은 것 역시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다고 여긴 탓이다.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건 교전은 이미 끝났을 뿐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양쪽 주장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다만 윤선거가 강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다. 때문에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에서 지냈다. 죽을 때까지 강도의 일은 그를 옭아맨 족쇄였다. 다만 이러한 일은 모두 왜란과 호란이라는 두 양대전쟁이 끝나면서도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백성을 먼저 생각한 위정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유학이라는 명분과 정통성이라는 궤변의 철학에서 비롯되어진 불행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여러 사건의 발달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북벌을 강조한 송시열은 이경석이 '청태종신도비문'을 작성할 당시에도 이경석을 사문난적이라고 표현하며 강하게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에 서계 박세당은 시대의 흐름상 어쩔 수 없는 것을 명분이라 하여 공격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었으며 이경석을 두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은거지인 석천동으로 들어가 호를 서계로 짓고 은거자숙하며 지내는데 권력층으로부터 수많은 벼슬이 내려오며 당시 시대의 석학에 대한 예우를 하는데(이러한 것은 노론의 뜻이 아니라 백성들로 부터 신망이 많았던 박세당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예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세당의 자화묘찬에서도 나오듯이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돌아눕지 않는다'는 말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월을 보낸다. 박세당의 자식들인 박태보나 박태유는 옥고의 난으로 죽음을 맞는다. 어쨌든 송시열은 윤선거와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절교하지 않았다.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에 죽자 제문까지 보냈다. 한데 윤선거 비문 찬술과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을 둘러싸고 감정이 폭발하며 루비콘강을 건너고 만다. 윤증은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를 송시열에게 주며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윤선거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냈다. 그의 덕을 기리는 구절에서는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고 마무리했다. 이에 윤증은 4~5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띄우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비문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 데만 고쳐줬다. 송시열이 제자 윤증의 마음을 저버린 건 두 가지 이 유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송시열은 옛정을 생각해 윤선거를 칭송하는 제문을 보냈는데도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받은 데서 무척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윤증이 비명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도 화근을 낳았다. 윤선거가 죽기 4년 전에 작성한 기유의서는 설령 윤휴·허목 등이 잘못했을지라도 같은 사림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 게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증은 윤선거가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선의로 보여줬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더욱 건드린 격이 되고 말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절교한 두 가지 이유 여기에 신유의서(辛酉疑書)가 덧붙여지면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증오가 싹텄다. 신유의서는 숙종 13년(1687)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 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이 편벽돼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신유의서에 대한 생각을 할 때에 명분과 실익은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사회와 지금의 사회를 구분하고 시비를 단정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역사는 후대에 평가해야 옳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어제의 과오를 오늘 평가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현실을 살아가는 지자(智者)의 모습이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줬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는 않았다. 헌데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박세채 집에서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했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다. 그 뒤 둘은 의절했고, 노·소론 분당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현재까지도 은진송씨와 파평윤씨는 통혼(通婚)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수 백년 동안 내려오는 사람의 관습이란 때로는 무서운 칼날과도 같다. 회니시비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시비로 이어졌다.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 의리에 입각해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다.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어차피 군신이 청에 항복한 이상 누구든지 그 비문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했다. 이것은 반박의 개념이 아니라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청나라에 항복하고 당상관도 아닌 당하관인 '삼학사'를 통하여 분기탱천하였다면 이것이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대등한 입장에서 화기를 돋구지 못하고 그 분풀이를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들에게 돌렸다면 지금이나 예전이나 젊은 사람들 버릇없다는 말 좀 들었을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우리에게 익히 들은 사람은 송시열이란 것에 대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 역사는 물과 같아서 과거로 회귀하여 살펴 볼 수 있으며 오늘을 바라볼 수 있고 미래를 추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실적이었던 남인의 학맥과 학통이 현재를 사는 관점의 논리상 바람직하지 않을까? 〈가례원류〉의 간행문제와 찬자 시비에서는 윤증의 배사론이 불거 졌다. 〈가례원류〉는 윤증의 스승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이다. 집필 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윤 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했을 뿐더러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햇빛을 봤다.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린 채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권상하라는 인물에 대해서 나는 정확이 모르지만 이 사람 또한 노론의 핵심인물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을 읽다보면 지금까지도 역사학의 주류는 노론과 안동김씨등의 핵심 멤버에서 그 주류가 나오고 있다는 해석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름 있는 명문가문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명문가문은 지금까지도 통용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관점이 사회의 변화를 시도하듯 역사의 현장에서 변화에 대한 몸부림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멸문지화를 당한 족속(族屬)들이 진정 명문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던 몸부림을 죽음으로써 맞이 하고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라고 외치었던 선비정신이 몸에 베었던 지식인들이야 말로 우리의 머릿속에 명문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이러한 것은 조선왕조왕릉이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때에도 확연이 드러나는 현실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왕릉 중에 세 개의 왕릉이 빠졌으니 그것은 정종의 릉과 연산군릉, 광해군릉이다. 정종의 릉이야 북한에 소재하고 있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연산군릉과 광해군릉이 빠져야 할 이유가 분명이 있을까? 역사의 한 객체로서 배우는 현재의 우리들이 받아들이기 마땅하지 않다. 나는 최소한 이러한 두 명의 왕릉도 소실(燒失)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어여 오는 바 당연이 조선왕조왕릉 중에 이 두 묘역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의 유림(儒林)인사들은 아직도 그 명백한 현실에 대하여 외면하며 두 릉을 제외시켰으니 우리가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시대착오적인 상황을 우습게 생각한다. 어찌보면 우리가 흔히 명문(名門)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였던 개념은 뚜렷한 객체적인 요소가 아니라 바람에 불과 하다. 요즘 서점에서 나도는 조선시대 양반에 대한 책은 지금까지도 그 학맥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아우성일 수도 있다. 이러한 아우성이 소통의 부재로 연결되며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는 데에는 전통의 계승을 넘어 안타까움이 와닿는다. 어찌 됐건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은 이처럼 여러 다방면의 각도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절대주의자였으며 숭명반청을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반면에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꿨다. 그의 사상 체계는 현실 정치와 경영을 바탕으로 한 현 세대에서도 '종학당'이라는 파평윤씨 가문의 학문연구기관으로 높게 평가되며 '500년 명문가문의 지속경영'에서도 나와 있다. 이러한 과정의 문제는 논(論)에 불과 할 수도 있다. 마치 지천 최명길이 청나라와 화해를 주장하며 문서를 작성하자 청음 김상헌이 그 종이를 갈기갈기 찢으며 인조에게 불가하다고 전하는데 지천 최명길이 그 찢어진 종이를 주우며 통곡하였다는 기록으로 보건데 명분은 말장난과도 같다. 실익이 없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 바람에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과연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붕당정치 밑바닥엔 나름대로의 정치철학 이 도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증의 논란에 대하여 시비를 하는 것은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능할 수 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어찌 보면 숭명반청이라는 말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광해군을 높이 사는 것은 현실적 중립외교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광해군이 서자였다는 점과 영창대군과 선조의 비인 인목대비 폐위 사건을 계기로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인조반정 자체가 정통성 확립이라는 명분의 기치였지 역사를 배우는 현실의 입장에서는 외교문제의 실패나 다름없다. 권력에 아부하며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이 진정한 유학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백성과 국민을 위하여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위정자의 길이 아닐까? 이 당시에 다산 정약용과 같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도 세도정치와 권력의 희생양으로서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그 높은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였다. 또한 실학의 대가 박지원도 장헌세자 사건으로 인하여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는데 벽파로 몰리며 정권에서 퇴로의 길을 맞는다. 그의 학문은 홍대용과 박제가등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이용후생의 개벽(開劈)을 주창하지만 노론과 세도정치에 가로막혀 그 가치를 발하지 못한다.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맞물려 '금관자 옥관자가 서말이라는' 권력의 독점으로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 독점을 막지 못하였던 지식인들은 죽음의 형장으로 이끌리며 '명분'이라는 논리에 의하여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