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파평윤씨 청송심씨의 산송


윤관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데, 이것을 두고 청송 심씨400년을 끈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정확한 위치는 광탄면 분수리. 두 문중의 묘지 다툼은 1614년(광해군 6) 청송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고려시대 명장이었던 윤관장군(?~1111) 묘 바로 위에 부친 묘를 조성한 뒤 일대 땅을 하사 받아 주변에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시작됐다. 파평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번져 현재에 이르게 됐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두 묘가 3m 남짓 떨어져 있는 데다 윤 장군의 묘역에 2m 높이의 돌담이 설치돼 심지원 묘의 앞을 가리는 등 조망권 문제로 후손들의 다툼이 이어져 왔다.

임진왜란 직후 윤관 묘는 관리되지 않아 버려진 상태였는데, 당시의 권신이었던 영의정 심지원이 이곳에 다가 자기 씨족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윤관의 씨족인 파평 윤씨 일족은 100년후 심지원의 묘를 일부 파내는 방식으로 항의하였는데, 심씨도 지지 않고 윤씨 일족의 처벌을 요구하며 사태가 커졌다.

두 문중은 모두 조선시대 왕비를 4명, 3명씩 배출한 외척 가문으로 당시 영조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으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해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노한 영조는 당사자를 때려 죽였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분쟁)이 늘어났던 이유는 조상을 공경하였던 유교사상과 묏자리에 따라 자손이 부귀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풍수지리설이 결합되어 퍼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안 묘역에 자기네 묘역을 조성하거나, 심한 경우는 아예 파내고 자기 조상을 모시는 일까지 벌어졌다. 영조는 이를 무척 짜증스러워하며 “근자에 상언(사대부가 임금에게 올리는 탄원)한 것을 보니 산송이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된다”고 투덜댄 적도 있다. 산송 문제가 하도 심각해지자 영조는 “늑장·유장·투장 같은 것을 각별히 엄금하고, 법대로 시행하고, 수령 또한 잡아 다 죄를 묻고, 비리를 엄단하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린다. 영조는 묏자리를 뺏는 것은 다른 이의 집을 찬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도 폈다. 이후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사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그러나 2006년, 청송 심씨는 심씨 일족의 묘를 이장하고, 파평윤씨는 필요한 토지 2500여평을 제공하는 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문화유산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근거를 내세워 이장을 거부함으로써 문제가 다시 불거질 기미를 보이는 듯하다가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이 방침을 철회하면서 결국 원만하게 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