坡平山[파평산] 아래 龍淵[용연] 못에서 五色雲霧[오색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우리 始祖[시조] 太師公[태사공]이 玉函[옥함]을 하시고 降生[강생]하신 坡州[파주]땅은 우리 白萬宗族[백만종족]의 永達[영달]한 고향이요 聖地[성지]가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坡州縣[파주현]은 본래 高句麗[고구려]의 坡害平史縣[파해평사현]인데 이를 新羅[신라] 景德王[경덕왕]이 坡平[파평]이라 개명하여 來蘇郡屬縣[래소군속현]으로 만들었다 한다.
高麗史[고려사],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및 坡州邑誌[파주읍지]를 보면 그후 고려 현종9년(1018)에 長湍縣[장단현]에 예속시켰고 문종 17년(1063년)에 開城府[개성부]에 예속시켰으며 예종때에 監務[감무]를 두었다. 또한 이곳에 있었던 瑞原郡[서원군]은 본래 高句麗[고구려]의 述爾忽縣[술이홀현]이었는데 신라에서 峯城[봉성]이라 고쳐서 交河縣屬縣[교하현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현종9년에 楊洲[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때 비로소 監務[감무]를 설치하였다.
李朝[이조] 태조2년(1393)에 이곳 고을 아전과 백성이 호소하여 승격하여 瑞原郡[서원군]으로 만들었고 태조7년에는 瑞原[서원]과 坡平[파평]을 합쳐서 原平郡[원평군]으로 만들었다.
태종조에는 交河縣[교하현]을 없애고 이 고을에 來屬[래속]시켰고 15년 千戶[천호]이상이라는 것으로써 都護府[도호부] 로 승격하였으며 18년에 다시 交河縣[교하현]을 설치하였다.
세조6년(1460)에는 貞熹王后[정희왕후](世祖妃[세조비]=貞靖公諱璠[정정공휘번]따님)의 貫鄕[관향]이라는 것으로 승격하여 牧[목]으로 만들어 坡州[파주]로 개명하였다. 연산갑자년(1504)에는 本州[본주]를 혁파하고 이 지역을 비워서 遊幸之所[유행지소]로 삼고 나머지 지역은 이웃고을에 나누어 붙였는데 그후 중종1년(1506)에 다시 坡州牧[파주목]으로 복귀하였는데 文獻備考[문헌비고]에 의하면 고종32년(1895)에 이르러 군으로 고쳤다.
이 고을의 옛 군명으로는 坡害平史[파해평사] 坡平[파평], 鈴平[영평], 述爾忽[술이홀], 峯城[봉성], 瑞原[서원], 原平[원평] 및 曲城[곡성] 등이 있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이나 坡州邑誌[파주읍지]에는 太師公[태사공]을 비롯하여 우리 列光祖[열광조]의 유적들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있는데 특히 始祖發祥地[시조발상지]인 龍淵[용연](一名嘉淵俗稱尹氏澤[일명가연속칭윤씨택])을 위시해서 坡平山[파평산](一名彌羅山[일명미라산]), 金剛寺[금강사], 彌陀寺[미타사], 熊潭[웅담], 臨津渡[임진도], 焚修院[분수원] 및 尙書臺[상서대]가 古跡名所[고적명소]로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輿地勝覽[여지승람]이나 坡州邑誌[파주읍지]의 人物條[인물조]에는 이 고을 인물로서 太師公[태사공]을 위시해서 僕射公[복사공], 文靖公[문정공], 文肅公[문숙공], 文康公[문강공], 文定公[문정공]을 거쳐 良簡公[양간공], 鈴平君[영평군], 版圖公[판도공], 昭靖公[소정공] 그리고 貞靖公[정정공], 平靖公[평정공](壕[호]), 領相公[영상공](弼商[필상])에 이르는 18대에 걸친 우리 列先祖[열손조]가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 栗谷李珥[율곡이이], 牛溪成渾[우계성혼], 河西金麟厚[하서김인후], 休庵白仁傑[휴암백인걸], 玄石朴世采[현석박세채] 등의 인물들이 실려있다.
그런데 世宗實錄地理志[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坡州[파주]가 原平都護府[원평도호부]로 표시되어있고 인물로는 우리 文肅公[문숙공] 한분만이 대표적으로 실려 있다. 輿地勝覽[여지승람]이나 坡州邑誌[파주읍지]의 陵墓條[능묘조]를 보면 이 고을의 名臣墓[명신묘]로서 먼저 文肅公[문숙공]묘소가 기록 되어 있고 昭靖公[소정공] 그리고 大提學公[대제학공](鳳朝[봉조]=昭靖公[소정공]11세손)의 묘소가 있으며 그밖에는 栗谷[율곡]과 牛溪[우계]의 묘가 있다. 왕가의 陵寢[능침]으로는 恭陵[공릉](李朝睿宗妃陵[이조예종비릉])과 順陵[순릉](李朝成宗妃陵[이조성종비릉])이 있고 특히 坡平山西麓[파평산서록]에는 世宗大王[세종대왕]의 別子潭陽君[별자담양군]의 묘소가 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