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묘표


太師公墓表

於戱此坡平尹氏之碑祖高麗太師諱莘達之墓太師公始出坡平縣左高麗太祖統合三韓爲功臣官太師 三重大匡卒葬干此卽慶州杞溪縣伐治洞九峯山下坐酉之原也墓前舊有表石有葬者踣而秘之子孫遂 失基兆間有傳記舊聞載在姓譜亦以無攷據不敢信後孫理尹慶州盖嘗求訪而未得令上十三年丁巳有 鳳廷爲營將聞人皆指爲尹太師墓乃直造墓下掘傍近土得碎碑一片刻大夫尹三大字於是宗人咸聳然 以喜而或慮三字之猶不足爲的證及理之子判書陽來按本道益發丁遍掘墓左右以搜七日又得基一片刻先之金剛四小字者寔公子三韓功臣孫左僕射兩世之諱也石理字畵與前所獲者實相類而大字之爲陽表小字之爲陰記可以認得則此地之爲公之藏始無疑矣凡吾姓尹者莫不奇幸而相慶惠敎與陽來府使東卨承旨彙貞縣令師道參判容謀曰以吾鼻祖之盛德偉功奕世蟬聯迄今殆千年入我朝誕生四國母尤盛矣塋域之事宜謹守靡替而中乃失之旣失之則得之甚難而今又得之豈非顯晦之有時而抑有陰相者存歟繼此而修闕廢以圖永久是在我後人遂遍告雲仍之散處入路者俾各出力以相適彙貞守是邦乃任是事伐石而表諸隧屬惠敎略記其蹟若公言行事業文獻旣莫徵焉後裔蕃衍遍國中不可勝書云

二十五代孫 吏曹判書 惠敎 謹記 二十四代孫 慶州府尹 彙貞 謹書

아아! 여기는 파평윤씨의 시조 고려 태사 휘 신달의 무덤이시다. 태사공께서 처음에 파평에서 나시어서 고려의 태조 대왕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여 공신이 되시고 벼슬은 태사 삼중대광이시다. 돌아가신 뒤 여기에 장례 모시니 즉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포항시 기계 봉계리)구봉산 아래 유좌(정서방)의 언덕이다. 무덤 앞에 옛날에 표석이 있었는데 투장한 사람이 깨어 헤쳐서 숨겼기 때문에 자손들이 드디어 그 무덤 있는 곳을 잃어 버렸다. 간혹 전기와 전하는 말을 족보(族譜)에 실리기는 하였으나 또한 차고할 만한 것이 없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손(後孫) 이(理)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적에 찾아다니다가 얻지 못하였고 지금 임금(영종) 십삼 년(정사)에 봉정이 영장이 되어서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가르켜 윤태사의 무덤이라 하기에 이에 바로 묘하게 가서 근처의 흙을 파 부서진 빗돌 한 조각에 대부윤(大夫尹)이라고 크게 새겨진 석자를 얻었다. 이에 종중 사람들이 모두 솟아오를 듯이 기뻐하기는 하나 혹은 석자 가지고는 오히려 족히 확증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염려하였다. 그러다 이(理)의 아들 판서(判書) 양래가 본도(경상도)에 부임하여 병정을 더 내어 무덤의 좌우를 두루 파헤치며 칠일동안 수색하여 또 선지금강 『 先之金剛 』이라고 작게 새겨진 네글자로 된 것 한 조각을 얻었다. 그런데 이는 곧 공의 아들 삼한공신과 손자 좌복야 양세의 휘자 이시다. 묻힌 돌의 자획(字劃)이 앞서 얻은 것과 크고 작기는 하지만 실로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큰 글자는 전면의 표기이고 작은 글자는 후면(後面)의 음기임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으니 그런즉 이곳이 태사공이 묻혀 계시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모든 우리 윤씨성을 가진 자가 기이하고 다행하게 생각지 않는 이가 없어 서로 경사(慶事)스럽게 여기었다. 이에 혜교가 양래와 부사 동설과 승지 휘정과 현령 사도와 참판 용으로 더불어서 꾀 하여 이르기를, 『 우리 시조의 성하신 덕과 위대하신 공으로 해서 대대로 계승하여 이제까지 거의 천년에 이르고 우리 조정(이조시대)들어와서 네 분 국모가 탄생하셨으니 더욱 성하였다. 그런 즉 산소에 대한 일을 마땅히 삼가고 지켜서 틀리지 않도록 해야 하거늘 중간에 잃었고 한번 잃은 것은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이제 또 찾았으니 이 어찌 때때로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수가 있고 또한 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것을 이어서 빠지고 없어진 것을 보충하고 마련해 오래도록 영구하게 전할 것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있다.』하였다. 마침 휘정(彙貞)이 이 고장을 지키게 되어 이에 이 일을 도맡아 보게 됐고 돌을 깍아서 이 산소의 모든 것을 표하게 되기에 혜교가 간략하게 그 사적만을 기록한다. 공의 언행과 사업 같은 문헌이 증거할 수가 없다. 후손들은 번성해서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어서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십오세손 이조판서 혜교는 삼가 기록한다. 이십사세손 경주 부윤 휘정은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