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찍이 아버지를 모시고 파주에 있는 용연에 가 보았는데 연못은 거칠고 풀이 무성하였으니 상서로운 기운과 왕성한 모양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시조가 이곳에서 태어나셨는데, 그 태어나심이 신의 힘으로 되는 불가사의한 일로 괴이하게 생각되나 우리 자손들은 족보를 살펴보건대 상고할 수 없는 일이다. 공의 휘는 신달이다. 처음 휘는 화신이요, 성은 윤씨이다. 신라 진성왕 7년 계축(서기 893)년 8월 15일에 태어나시어 본을 파평으로 삼았다. 공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고 벽상삼한익찬공신 삼중대광태사가 되셨으니, 혜종이 동경 대도독으로 나가시게 한 뒤에 30년 동안이나 다시 부르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파평산 아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윤노파가 물위에 떠 있는 상자를 건져보니 어린아이가 있었으며, 양쪽 어깨에 큰 붉은 반점이 있었는데 일월(日月)의 형상을 했으며,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여 품에 안고 와서 기르시니 그 성이 윤씨요, 이름이 화신이다. 점점 자라매 지혜와 재주가 출중하여 오경(五經)에 능통하셨고 병서와 말타기 활쏘기를 파평산에서 익히시어 뒤에 사람들이 이곳을 치마대라고 하였으며, 윤노파가 돌아가신 뒤 의지할 곳이 없어 재상 유보림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집 사람들의 꿈에 공의 침소에서 황룡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날이 가물어 주인이 기우제 제문을 지으려고 하는데 글귀가 떠오르지 않던 중, 공이 옆에서 제문을 지어 바친 즉 그 내용이 “군신이 재앙을 받는 것은 마땅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까지 마르게 할 수 있는가?”하여 주인이 그 글을 택했다. 그 후 장녀를 공의 부인으로 차녀는 왕건 태조의 비(妃)로 고려 왕조와 인척간이다. 공은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태사에 오르셨고 매양 군사를 이끌 때 덕행으로 다스려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어서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여 왔으며 조정에서 조회할 때 왕께서 태사공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고려를 창업하게 된 것은 모두 태사공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왕건 태조가 돌아가신 후 혜종이 등극하여 전왕의 공신들을 의심하여 유금필은 자곡령에 유배하고 공은 경주도독으로 나가시게 하였다. 보첨마다 공의 탄생에 대한 유래가 다소 다른 점이 있으나 조상에 대하여 욕되는 바는 없다. 고려 광종 계유(973)년 81세에 서거하시니 묘지를 경북 기계현 벌치동 구봉산 아래 유좌의 언덕에 모셨으며, 그 근처에 봉강서원을 짓고 제향을 지냈다. 배위는 문화 류씨인데 합장했다. 아들은 휘 선지로 벽상담한공신이요, 손자는 휘 금강이요, 좌복야인데 이하는 쓰지 않는다. 공의 위훈이 컷음에도 아직 신도비가 없던 차에 종인 귀보가 찾아와 조상을 위하는 조그만 정성으로 장차 묘문 밖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는데, 그 새길 글을 청하기에 거듭 사양하였으나 사양을 이루지 못하고 감히 보첨에 있는 것을 소재로 삼고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글을 지었다. 명에 이르기를 아! 큰산에서 신령이 강림하여 옥동자로 태어났네. 저 맑은 물 동쪽에서 어진 재상 태어났네. 공께서 태어나심이 또한 신기하고 이상했네. 지금도 검소하고 순박하니 대궐의 도리를 의심하리. 높은 덕으로 집을 일으키셨으니 파평산은 우리조상 위함일세. 재주는 나라에 크게 쓰여 고려조를 세우셨네. 공훈은 높아 벽상이니 영화로움 다 했도다. 동경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변방으로 나가셨네. 그 밝고 그 어두움은 공의 잘잘못은 아니로다. 세상을 위하는 도리로는 탄식으로 그칠 수 없네. 어찌하여 대통을 이어받은 후 창업전 일을 생각지 못하는가. 엄격한 교훈으로 충효를 전하였네. 어진 후손들은 이름난 재상과 큰 벼슬을 했네. 천만 대에 걸쳐서 이어지고 또 이어지리라. 시조강생 1074년 신해 9월 27일 32세손 귀보 삼가 세우고, 31세손 석훈은 삼가 찬하고, 33세손 대혁은 삼가 전자를 쓰고, 36세손 동직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