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산, 용의 후손을 보듬다 :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 |
root | 2020.09.08 06:48 | |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오르면 벌거벗은 북한의 산하가 임진강
너머로 한눈에 들어온다. 임진각에는 망향의 한이 서려 있다. 남북
대치국면을 이해하는 데 가장 피부에 와닿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양이 꽃봉오리라면, 파주는 꽃받침에 해당되는 자리다. 추가령에서 북악산까지 이어지는
큰 줄기를 한북정맥이라 하는데, 한양이라는 대명당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북정맥의 강한 기운이 뻗친 탓에 파주에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무덤들이 몰려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 오랜 두 가문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파평윤씨와
교하노씨이다. 파평산의 위용 높다고 산은 아니다. 신성함과 신령함이
서려 있어야 산이다. 군부대가 진주하는 산에는 신성함이 사라진다. 산
정상에서 오물을 쏟아내는 곳에서 신령스러움은 존재할 수 없다. 군부대가 떠나야 산은 새로운 기운으로
새로운 인재가 태어날 것이다. 120만을 헤아리는 파평윤문에서 지금도 많은 인재가 배출되는 것은 사실이나
윤관 장군과 같은 영웅이나 정희왕후 같은 여걸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파평산의 군부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파평산(坡平山·496m)은 파주에서는 꽤 높고 큰 산이다. 파평면은 산의 이름이 지역의
이름이 된 곳이다. 파평산 정상에는 현재 군부대가 진주하고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동쪽의 낮은 봉우리는 개방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관악산, 무등산, 일월산, 해룡산, 황병산 등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산 위에는 거의 군부대가 장악하고 있다.
남북대치의 불가피한 상황이다.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이 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산을 마음대로
오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파주는 파평윤씨의 영원한 고향이다. 파평산의
동쪽과 북쪽을 거의 휘돌아 감으며 흐르는 눌노천이 파평산 정상에서 뻗어나온 능선과 만나면서 작은 호수를 하나 만드는데, 이를 용연(龍淵)이라
하며, 이곳이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尹莘達·893-973)의 탄강지(誕降池)이다. ‘용연에는 용인(龍人)이 살았는데, 신라 진성왕 7년(서기 893년)에 용연
위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옥함이 떠올랐다. 날이 저물 때 용연가에
살던 노파가 옥함을 건져서 열어보니 어린 아기가 누워 있었다. 옥함에 윤(尹) 자가 새겨져 있어서 아기는 윤씨의 성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이 아기는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었고 그의 이름이 윤신달이다.’ 탄생설화에서 천마나 용, 새를 이용하여
하늘과 연관시키는 구조의 설화는 선민사상(選民思想)으로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나타낸다. 용인이란 반수반인이지만, 왕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못에 옥으로 된 상자가 떠올랐다고 하는 것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기이기는 하나
부적절한 관계로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상자라는 것은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설정이다. 김알지 설화, 김수로왕 설화, 모세
설화가 같은 종류다. 옥함에 윤 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아비의 성이 아니라 어미의 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대적 상황을 보면 모계사회의 성향이 많이 남아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추론해보면
신라의 왕족이 파견을 나와서 근무하다가 이 동네의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윤신달이 태어났다는 가설과, 왕의 혈육이지만 파워게임에 밀려나 살해될 위험에서 도망친 왕족이라는 가설도 성립된다. 그래서 유모인 노파를 시켜서 용연에서 상자를 꺼내어 사내아이를 키우게 했던 것이 아닐까. 이 설화는 창녕조씨의 시조 조계룡의 탄생설화와 다른 듯 같은 분위기다. 조계룡도
용지(龍池)에서 용의 아들로 태어나며, 후에 신라 진평왕의 사위가 된다. 왕실의 사위가 될 정도이니 아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지만 막강한 후견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겨드랑이에 있었던 조(曺) 자가 그의 성이 되었다고 한다. 윤신달이 신라왕족의 피를 이어받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역사적인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는 고려의 삼한통합의 개국공신이 되어 높은 벼슬에 오르지만, 경주대도독으로 경주에 부임한 후 30년 동안 개성에 올라오지 못한다. 개경에 볼모(?)로 잡힌 아들의 얼굴도 상면하지 못한 채 죽어 경주
인근에 묻힌다. 그가 고려 건국 직후 경주에 가서 신라유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막중한 책무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근무한 30년 동안 반란이 없었던 것은 신라유민의
신뢰를 받았다는 결론인데, 그럴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윤신달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신라왕족의 혈족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경주에서 신라 유민을 잘 다스린 것을 보면 윤신달이 부드러운 인물이었거나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거나 평화롭게 만드는 리더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신달은 파평산을 수호산으로
태어났다. 사람의 성품은 수호산의 성정을 닮는다. 산의 이름에
평(平) 자가 있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50세까지 파평산에서 살았던 윤신달은 평화가 몸에 배었을 것이다. 이것이
큰 바위 얼굴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 윤신달이 경주로 발령이 나서 민심을 추스르는 일을 맡았던 가장
큰 이유다. 윤신달이 여기에서 발견되었고 성장했지만,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권력의 암투가 심했을 당시에 왕족혈통은 자칫 살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으므로
경주에서 태어나서 이곳까지 이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윤신달은 변방에서 자라나서 새로운 왕국의 공신이
되었다. 통일신라의 주역 김유신 장군도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변방이란
거칠고 위험한 장소다. 이런 곳에서 쇠를 담금질하듯이 심신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심신의 단련은 명석한 판단의 바탕이 되고 기회를 포착하는 과단성을 길러 주었을 것이다. 풍수란 그릇이 큰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지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게 하는 기술이 아니다. 변방에 명당이 있다는 설은 예나 지금이나 떠도는 말이다. 사실 정맥의 끝자락을 말하는 것인데, 정맥의 끝자락이 변방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보아도 김영삼(거제 부산), 김대중(신안 목포), 노무현(김해), 이명박(포항) 대통령의 생가나 성장지가 대부분 바닷가다. 정맥과 같은 큰 산줄기와
큰물이 만나야 큰 기운이 생성되는 이치다. 이런 지역은 중심이 될 수도 있고 변방이 될 수도 있는 묘한
곳이다. 용연龍淵 노사신 조부 노한의 묘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 윤관 장군 묘역 용미리 석불입상 파주는 파평윤씨들의 왕국(?)이다. 여기저기 윤문(尹門)의
흔적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 윤관(尹瓘) 장군(1040-1111)의 묘는 압권이다. 바람이 새어나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형국이 조밀하며 물이 나가는 곳을 찾기 어렵다. 안산이 토성이면서도 다정하고 주산 또한 옹골차게 뭉쳐져 있다. 윤관
장군의 묘자리는 뒷산에서 능선이 급하게 내려오다가 한번 살짝 머뭇거리고 두 번째 머무는 곳에 자리하였다. 여진정벌과 9성을 쌓아 나라의 변방을 굳건히 한 고려의 명장으로 천 년을 버티어 묘지가 전해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보병학교에서 보병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윤관
장군 묘를 보면 좌청룡 우백호가 겹겹이 있듯이 자손들이 엄청나게 번창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