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첨 처 대흥군부인 한씨 묘지명 | |
root | 2020.08.26 08:12 | |
(1) 高麗國卒守大師門下侍中寶文閣大學士 (2) 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文定公尹鱗瞻 (3) 妻大興郡夫人韓氏墓誌銘 (4) 夫人姓韓氏系出大興郡考中書侍郞平章 (5) 事惟忠祖兵部侍郞御書檢討官元卿曾祖 (6) 左司郞中起居注知制誥億妣翼陽郡大夫 (7) 人金氏吏部尙書文德殿學士商佑之女也 (8) 夫人以天慶四年甲午生生有淑質不煩師 (9) 傅聰明婉孌父母所鍾愛長擇所歸以適尹 (10) 氏諱鱗瞻門下侍中文肅公瓘之孫政堂文 (11) 學文康公彦頤之子侍中於睿廟時丁亥年 (12) 爲元帥拓東蕃九城威振北狄至於孫於當 (13) ▨五年甲午亦爲元帥平定西賊以是夫人 (14) ▨家門功業甲於三韓人無間側者也夫人 (15) ▨生平奉養父母舅姑肅恭誠至事天義以 (16) 順敎子愛以公所謂能盡其婦道者矣生子 (17) 六人長曰宗諤守大府注簿次曰宗誨判禮 (18) 賓省事次曰宗諴國子監大司成知制誥次 (19) 曰宗詝國子進士次曰宗諹刑部侍郞知制 (20) 誥季男早逝諸兄弟亦皆先夫人而卒然而 (21) 國朝之制三子登科者其母有祿夫人之三 (22) 子諤宗諹皆登第故夫人終身受國俸有孫 (23) 子五人刪定都監判官尹公以適長主喪事 (24) 夫人自丙申年侍中逝後常以事 (뒷면) (25) 備爲任未嘗懈怠以大金大定二十九年己 (26) 酉八月四日以疾卒于家前三日預知時至 (27) 改衣淨浴至時恬然而化享年七十六以是 (28) 月十五日葬于 (29) ▨(佛?)日寺坤山之麓禮也銘曰 (30) 生於世家 擇其所適 夫人之貴 (31) 長於閥閱 歸于公族 人無與敵 (32) 入奉父母 出事舅姑 夫人之孝 (33) 攵承(?)顔色 恭勤晨夕 無人間側 (34) 敎育弟子 夫人之慈 生平好善 (35) 其衛(?)不▨ 如春之澤 事佛弥篤 (36) 臨終不亂 夫人之行 貴孝慈行 (37) 慨(?)然而寂 如圭如壁 一無虧失 (38) 富壽哀樂 吁嗟諸子 嗚呼哀哉 (39) 有始有卒 不恝遺一 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수태사 문하시중 보문각대학사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大師 門下侍中 寶文閣大學士 判兵部事 上柱國 監修國史) 문정공(文定公) 윤인첨(尹鱗瞻)의 부인 대흥군부인(大興郡夫人) 한씨(韓氏) 묘지명(墓誌銘) 부인의 성(姓)은 한씨(韓氏)씨로, 가계는 대흥군(大興郡) 출신이다. 아버지는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 유충(惟忠)이고, 조부는 병부시랑 어서검토관(兵部侍郞
御書檢討官) 원경(元卿)이며, 증조부는 좌사낭중 기거주 지제고(左司郞中 起居注 知制誥) 억(億)이다. 어머니는 익양군부인(翼陽郡大夫人)
김씨(金氏)로,
이부상서 문덕전학사(吏部尙書 文德殿學士) 상우(商佑)의 딸이다. 부인은 천경(天慶) 4년 갑오(예종 9, 1114)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선량한 자질을 지녀 스승을
두지 않았어도 총명(聰明)하고 아름다워 부모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장성하자 시집갈 곳을 골라 윤씨(尹氏)에게 시집보냈으니, (남편의) 이름은
인첨(鱗瞻)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숙공(文肅公) 관(瓘)의 손자이자 정당문학(政堂文學) 문강공(文康公) 언이(彦頤)의 아들이다. 시중(侍中, 윤관)은 예묘(睿廟, 예종) 때인 정해(예종 2, 1107)년에
원수(元帥)가 되어 동번(東蕃) 9성을 개척하여 북적(北狄, 여진족)에게 위엄을 떨쳤고, 지금 (임금이
즉위한)▨ 5년 갑오(명종
4, 1174)에 손자가 또한 원수(元帥)가
되어 서적(西賊,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였으니, 이 때문에 부인
▨가문의 공업(功業)은 삼한(三韓) 가장 뛰어나 맞설 수 있는자가 없다. 부인은 ▨ 평생 항상 부모와 시부모를 봉양(奉養)하면서 공손하고 공경하게 지극히 섬겼으니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자녀를
가르치며 사랑으로 공평하게 하니 이른바 부인의 도리를 다 하였다고 이를만하다. 아들 6명을 낳았는데, 장남 종악(宗諤)은 수대부주부(守大府注簿)이고, 차남 종회(宗誨)는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3남 종함(宗諴)은 국자감대사성 지제고(國子監大司成 知制誥), 4남 종저(宗詝)는 국자진사(國子進士)이고, 5남 종양?(宗諹)은 형부시랑 지제고(刑部侍郞 知制誥)이다. 막내 아들은 일찍 죽었고, 여러
형제들 또한 모두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나 나라의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어머니에게
녹을 주었는데, 부인의 세 아들 종악(宗諤), 종함(宗諴), 종양(宗諹)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으므로 부인은 종신토록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았다. 손자는 5명인데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윤공(尹公)이 적장(適長)으로서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부인은 병신(丙申)년에 시중(侍中)이 돌아가신 후부터 항상 일<장례>을 준비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아서 일찍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대금(大金) 대정(大定) 29년 기유(己酉) 8월 4일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3일 전에 (죽을) 때가 이른 것을 미리 알고 옷을 갈아입고 깨끗이 목욕하고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향년(享年) 76세이다. 이 달 15일에 ▨일사(佛日寺) 서남쪽(坤山)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에
따른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세가(世家)에서 태어나 벌열(閥閱)에서 장성하고 결혼할 곳을 택하여
공족(公族)에 시집갔으니 부인의 존귀함은 맞설
이가 없네. 안에서는 부모를 봉양하며
안색을 가다듬어 받들고 나가서는 시부모를 섬기며
아침저녁으로 삼가 부지런히 모시니 부인의 효도는 다른
이가 넘볼 수 없도다. 자제를 가르치며 그
지킴(?)에 ☐하지 않으니 부인의 자애로움은 마치
봄날의 연못과도 같으며 평생토록 선행을 좋아하고
부처를 독실하게 믿었네. 임종(臨終)할 때도 어지럽지 않고 개연(慨然)하게 떠나시니 부인의 행실은, 규벽(圭壁, 옥)과 같아서 귀함과 효도와 자비와
행실에서 한 점도 이지러짐이 없도다. 부귀와 장수와 슬픔과
즐거움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나 아쉽게도 여러 아들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돌아갔으니
아,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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