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공 윤보 묘표
root | 2020.08.26 08:09

僉議政丞

文顯公尹

珤之墓

蔚山郡夫

人朴氏之墓

嗚呼此我先祖高麗三重大匡守僉

議政丞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

判選部事鈴平府院君諡文顯公之

墓也公諱珤初名文玉太師諱莘達

之十世孫也高祖諱惇信兵部侍郞

曾祖諱商季西京副留守祖諱復元

太常錄事贈左僕射考諱純監察御

史贈平章事妣洪州李氏禮賓少尹

昀之女公沈靜自重登第於忠烈王

朝忠烈四年王別寘一官選一時重

望以處之委以機務公與金周鼎鄭

可臣等預焉嘗以左承旨知貢擧取

崔凝等歷拜密直學士弘文館學士

儀曹尙書密直副使成均館大司成

修文殿學士西北面都指揮使忠肅

王八年守僉議贊成事致仕十六年

己巳七月十一日丙寅以守僉議政

丞卒諡文顯忠烈王嘗謂左右曰人

臣之節漸不如舊昔尹珤李混主銓

選寡人欲以混弟爲行首珤子安庇

爲權務珤曰臣子年少臣又掌銓不

敢受混亦固辭今之主銓選者先以

美官授親戚況望辭乎語見李混列

傳蓋公與混及鄭瑎在政房相推致

云嗚呼今距公之卒三百六十有七

年矣其見於麗史者只此數款而已

公當麗之季世以文學登庸歷試內

外晩節致仕善始令終無一瑕玷其

居家立朝德善功烈之可紀可傳者

何限而今皆昧昧無可徵嗚呼豈獨

我後裔之私恨而已配蔚山朴氏封

郡夫人判書保之女子長曰繼宗三

宰次安代言次中奉祿君次安

淑僉議贊成事良簡公次諳少府尹

次安庇左代言四女壻曰齊乙豆李

繼芳尹莘保鄭思遠繼宗至子仁貴

而絶中亦無後安安淑諳安庇

四派至今蕃衍冠冕不絶名臣碩輔

相望於譜牒蓋我坡平之尹今盈於

國中者唯文康公長子文定公鱗瞻

一派之外皆公四派之裔也良簡公

之後最大數世之後代出 國母誕

生 聖人本支百世作我 朝任姒

此實吾東大姓之所罕有也嗚呼源

深者瀾盛德厚者流光公之事行雖

未能詳而其盛德遺澤可驗於悠久

者如此凡我後裔可不知其所本而

思所以保守而無忝也哉墓在今長

湍府治東南三十里古縣作木谷甲

坐庚向之原公與夫人之墓爲雙墳

公左夫人右舊有短表歲久刓缺我

諸後孫懼其堙滅無識也相與治石

而改豎之又以爲舊表只有前面大

字而無陰刻今不可不略記事實以

示後也諸宗人遂以命拯不敢辭謹

記如右主管此役者十五世孫今吏

曹判書趾善承文正字趾仁也

首行所書職銜卽家牒所載也

十四世孫資憲大夫工曹判

書兼 世子侍講院贊善

拯謹述

十五世孫崇政大夫行吏曹判書

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趾善

謹書

崇禎紀元戊辰之後六十八年乙亥

 

七月 日改立

 

첨의정승 문현공(文顯公) 윤보(尹珤)의 묘

 

울산군부인 박씨의 묘

 

아아! 이것은 우리 선조인 고려 삼중대광수첨의정승(三重大匡守僉議政丞)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시호 문현공(文顯公)의 묘소이다. 공의 이름은 보()요 초명은 문옥(文玉)이니 태사 신달(莘達) 10세손이다. 고조부는 병부시랑 돈신(惇信)이고, 증조부는 서경부유수 상계(商季), 조부는 태상록사 복원(復元)인데 좌복야(左僕射)에 증직되었다. 부친은 감찰어사 순()이니 평장사에 증직되었고, 모친은 홍주(洪州) 이씨(李氏)로 예빈소윤 윤()의 따님이다.

공은 마음이 고요하고 몸가짐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렬왕 4(1278)에 왕이 한 관청을 별도로 두고 당시 중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근무시키고 기무를 맡겼는데, 공과 김주정(金周鼎), 정가신(鄭可臣) 등이 참여하였다. 일찍이 좌승지로 과거를 주관하여 최응(崔凝) 등을 뽑았고, 밀직학사, 홍문관박사, 의조상서(儀曹尙書), 밀직부사, 성균관대사성, 수문전학사, 서북면도지휘사를 역임하였으며, 충숙왕 8(1321)에 수첨의찬성사로 치사하고, 16년 기사년(1329) 7 11일 병인일에 수첨의정승으로 별세하셨으니 시호는 문현이다.

충렬왕이 일찍이 주위 사람에게신하의 절조가 점점 전만 못하다. 옛날에 윤보와 이혼(李混)이 관리의 인사를 주관할 때 과인이 혼의 동생을 행수(行首)로 삼고 보의 아들 안비(安庇)를 권무(權務)로 삼고자 하였는데, 보가 말하기를신의 아들은 나이가 어리고 또 신이 인사를 담당하니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혼도 역시 완강히 사양했었다. 지금 인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먼저 좋은 관직을 친척에게 주고 있으니 하물며 사양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이혼열전』에 보인다. 공과 혼, 그리고 정해(鄭瑎)는 정방(政房)에 있으며 서로 밀고 끌어주었다고 한다.

아아! 지금 공이 별세하신 지 367년이 되니 『고려사』에 나타난 것은 단지 이런 몇 가지일 뿐이다. 공은 고려의 말년에 문학으로 등용되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만년에 치사하시어 시작도 좋고 끝도 좋아 하나도 잘못이 없었다. 집에 거처함에나 조정에 출사하여서나, 훌륭한 덕과 공렬을 기록하고 전할 만한 것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마는 지금은 모두 분명하지 않아 징험할 수 없다. 아아! 어찌 다만 우리 후손들만의 사사로운 한이겠는가?

부인 울산(蔚山) 박씨(朴氏)는 군부인(郡夫人)에 봉해졌는데 판서 보()의 따님이다. 장남 계종(繼宗)은 세 번 재상을 지냈고, 다음은 대언(代言) 안적()이며, 다음은 봉록군(奉祿君) 중조()이며, 다음은 천의찬성사 양간공(良簡公) 안숙(安淑), 다음은 소부윤(少府尹) (), 다음은 좌대언(左代言) 안비(安庇)이다. 딸은 넷이니, 사위는 제을두(齊乙豆), 이계방(李繼芳), 윤신보(尹莘保), 정사원(鄭思遠)이라고 한다. 계종은 아들 인귀(仁貴)에 이르러 대가 끊어지고 중조도 역시 후사가 없다. 안적, 안숙, , 안비의 네 개 파는 지금까지 후손이 번창하여 벼슬한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름 있는 신하와 왕을 보좌하는 어진 신하들이 보첩에 계속 이어졌다. 아마도 지금 나라에 가득한 우리 파평윤씨는 오직 문강공(文康公)의 장남인 문정공(文定公) 인첨(鱗瞻)의 한 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의 네 개 파의 후송일 것이다.

양간공의 후손이 가장 성대하니 몇 대 이후에 대대로 국모를 배출하여 왕을 탄생하였다. 본파와 지파가 백세를 이어지며 우리 왕조의 왕비가 되었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큰 성씨중 드문 일이다. 아아! 근원이 깊은 물은 물결이 성하고 덕이 두터운 사람은 감화가 멀리 미치는 것이다. 공의 행적이 비록 상세하지는 않아도 그 훌륭한 덕과 남기신 은택이 오랜 후에 증명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우리 후손이 그 근본을 알아서 보존하여 지킬 것을 생각하여 욕됨이 없게 하지 않을 수 않겠는가?

묘는 지금 장단부(長湍府) 관아의 동남쪽 30리인 고현(古縣) 작목곡(作木谷)의 서향 언덕에 있다. 공과 부인의 묘는 쌍분으로 되어 있는데, 공이 왼쪽, 부인이 오른쪽이다. 예전에 짧은 표석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닳아 훼손되었다. 우리 여러 후손들은 표석이 없어져 알 수 없게 될까 걱정하여 서로 함께 돌을 다듬어 다시 세운다. 또 예전 표석은 단지 앞면의 큰 글씨만 있고 뒷면에는 새긴 것이 없으니, 지금 대략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친척들이 마침내 나에게 명하니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한다.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15세손으로 지금 이조판서인 지선(趾善)과 승문정자 지인(趾仁)이다. 앞머리 행에 적은 직함은 바로 가첩에 실린 것이다.

 

14세손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세자시강원 찬선 증()은 삼가 기술하고

15세손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지선(趾善)은 삼가 글씨를 쓴다.

 

숭정 기원 무진년 후 68년 을해년(1695, 숙종 21) 7월 일에 고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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