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三山神道碑 | |
root | 2020.08.26 07:54 | |
有明朝鮮國贈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鈴川府院君行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尹公神道碑銘并序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達城君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徐居正 撰純 試 佐 理 功 臣 資 憲 大 夫 吏 曺 判 書 兼 五 衛 都
摠 府 都 摠 管 東 菜 君 鄭 蘭 宗 書 成化二十二年丙午五月日鈴原府院君尹公以先君墓碑屬居正曰先君種德不食遺我后人 中宮殿下正位坤極推恩示先君亦荷追贈 賜祭異數稠重榮夸己極而尙無墓碑恐未能發揚先德請子有徐居正謹按尹氏坡平望族遠祖諱莘達佐麗祖封三韓功臣生左僕射金 剛左僕射生右僕射執衡右僕射生太師門下侍中鈴平縣開國伯文肅公諱瓘文肅有文武全才佐肅睿二朝出入將相親杖節鉞逐女眞復九 城立碑公嶮鎭先春嶺拓地闢疆屹然爲國長城懋德懋功載在彛鼎卒配睿宗廟庭有五子尤顯隆者曰政堂文學諱彥頤諡文康文學生兵部 侍郎諱惇信兵部生▨▨少尹商季少尹生太常錄事復元錄事生監察御史純御史生鈴平府院君自是世濟其美多達官聞人有諱陟封鈴 平君於公爲曾祖生門下評理諱承順評理生佐命功臣坡平君諱坤后配淸州大姓韓氏文烈公尙質之女封謹順宅主以永樂丙戌五月丁亥 生公諱三山字壽翁生而頴異讀書通大義以蔭除 宗廟令歷官尙瑞主簿三軍親從至漢城少尹爲治有裕丙寅出守楊根郡以政最聞秩 滿拜知通禮門事 文宗在東邸監禮左右在傍諸臣皆遴選一時有名望者以公爲詹事院同詹事庚午丁外憂服闋授判典農寺事尋遷判 通禮門事丙子除兼知兵曹以疾辭移僉知中樞 世祖以公 貞熹王后近親待遇優渥屢遺使存問 賜藥劑然病劇治療無效丁丑八 月壬寅卒享年五十二冬十二月葬于竹山縣楓井里乙坐辛向之原夫人李氏左議政諱原之女後公六年壬午八月壬午卒葬陽智古縣西子 坐午向之原兩塋相距僅百步成化庚子追封領中樞府事夫人封貞敬生六男三女曰塢上護軍曰塘察訪曰壕中壬辰文科今爲領敦寧曰垓 兵曹叅知曰坦宗簿正曰坡中甲午進土▨今爲義盈庫令女一適僉知▨▨▨▨次適宗室西林正怟次適靑原正霂公生長富貴無膏梁紈綺 之習姿儀端重性度溫醇爲官莅事奉公守正居家亦廉謹愼密敎諸幼勸之勸學又勉以忠孝節義苟有過嚴加訓誨六子奉承不怠各自樹立 及躋通顯皆以良能著稱公好文雅不事▨粉華留神於書畫▨而畫又妙絶然公不以是眩能於人求譽於時故知者盖寡鳴呼以公之德之才 之賢人皆期以遠到而享年不高不大厥施遽至於斯耶予惟根深者枝必大源遠者流必長理之自然尹氏淸德於家公又克承前烈積善毓慶 者亦深且遠則雖於身壽不滿德位不稱能而天必委祉錫福於后嗣也無疑矣鈴原篤生 俔天伉儷 至尊堪儀一國金枝玉葉繼繼繩繩 以基我 朝鮮億萬▨無彊之休鈴原又以 國舅之尊坐享福祿門閥華盛子孫繼述袞袞將來之慶容有艾乎居正文拙安能鋪張盛德侈先 榮而昭後世乎但忝在戚鄰義不敢辭謹撮其世系源派公之歷官顚末衰榮終始大要而爲之辭銘曰 坡平之尹有其源曰自鼻祖策三韓勳堂堂之文盖世之雄曰文曰武以德以功克大以振厥聲渢渢子孫趾美世襲貂蟬名門擅譽垂六百年 顯允坡平遭遇 盛際名載旂常功存帶礪公肖其德遹駿有聲天胡卑德獨不與齡有種必穫施于令子聯芳襲美儲祥萃祉 椒闈衍慶門閥 益昌 天錫增恩金誥焜煌 賜祭焚黃有苾其香光賁至此公亡易曰積善詩云 降祥天之報施亦孔之彰有封若堂于竹之原有崇其碑 載敭其芬昭示來裔不者存
成化丙午六月 日立
유명조선국
증 보국 숭록대부 영 중추부사 영천부원군 행 통정대부 첨지 중추원사 윤공 신도비명 병서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 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서거정(徐居正)은 글을 짓고
순성좌리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래군 정난종(鄭蘭宗)은 글을 쓰다. 성화 22년 병오 5월
일에 영원부원군 윤공이 선군의 묘비를 나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선군께서는 덕만 심고 복을 받지는 아니하신
채 그 영광을 우리 자손들에게 넘겨주시었네. 그러나 중궁 전하께서 곤극의 자리에 오르시자 추은하여 총영을
보이시니 선군께서도 역시 추증과 사제를 입어 이수(異數)가
쌓이고 영과도 극진한 편이나 아직껏 묘비가 없으니 선덕을 능히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가 되네. 청컨대
그대가 좀 생각해보게.”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윤씨는 파평의 망족이니 원조 휘 신달(莘達)은 고려조를 도와 삼한 공신에 봉해졌는데, 이 분이 좌복야 금강(金剛)을
낳고, 좌복야는 우복야 집형(執衡)을 낳았으며, 우복야는 태사 문하 시중 영평현 개국백 문숙공 휘 관(瓘)을 낳았다. 문숙은
문무의 전재가 있어서 고려 숙종과 예종 양조를 도와 출장 입상하면서 친히 절월(節鉞)을 짚고 여진족을 쫓아 9성을 회복하고 공험령에 비를 세우는 등 땅을
개척하고 지경을 넓혀 흘연히 나라의 장성이 되었으니 큰 공과 큰 덕은 이정(彛鼎)에 실리고, 졸하매 예종의 묘정에 배향까지 되었다. 이분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가장 높이 현달한 사람은 정당문학 문강공 휘 언이(彦頤)이다. 문학이 병부 시랑 휘 돈신을 낳았고, 병부가 서경 소윤 상계를 낳았으며, 소윤이 태상녹사 복원을 낳았고, 녹사가 감찰어사 순을 낳았으며, 어사는 영평부원군 보를 낳았다. 여기에서부터는 대대로 그 훌륭함을 이어 달관과 문인이 많아 휘 척은 영평군에 봉해지기까지 하였으니 공에게는
증조가 된다. 이분이 문하 평리 휘 승순을 낳았고, 평리가
좌명공신 파평군 휘 곤을 낳았는데, 그의 후배는 정주 대성인 한씨 문렬공 상질의 따님으로 근순택주에
봉해졌다. 이 분이 영락 병술 5월 정해일에 공을 낳으니
휘는 삼산(三山)이요 자는 수옹(壽翁)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이하여 글을 읽으면 바로 대의에 통하였다. 음직으로
종묘령에 제수되었고 상서 주부, 삼군 친종 등의 벼슬을 거쳐 한성소윤에 이르렀는데 백성을 다스림에 여유가
있었다. 병인년에는 양근군을 출수하였는데 가장 잘 다스린다고 이름이 알려졌고 임기를 마치니 지통례문사를 배수하였다. 문종이 동저에 있을 때 좌우의 감례나 곁에 있는 제신들을 모두 일시에 명망이 있는 사람들로만 뽑았는데 공에게는
첨사원 동첨사를 시켰다. 경오년에는 외우를 당하였고 복을 벗으니 판전농시사를 제수하였다가 얼마 후에는
판통례문사로 옮겨졌다. 병자년에는 지병조를 겸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함에 첨지 중추로 옮겨졌다. 세조가 공이 정희왕후의 근친이라 하여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묻고 약제까지 내렸으나 치료한 보람도 없이
정축년 8월 임인에 졸하니 향년 52세이다. 그해 겨울 12월에 죽산현 풍정리 을좌 신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이씨는 좌의정 휘 원(原)의
따님인데 공보다 6년 뒤인 임오 8월 임오일에 졸하여 양지
고현 서쪽 자좌 오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두 무덤의 거리는 겨우 백 보밖에 안된다. 성화 경자년에 영중추부사에 추봉되고 부인도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6남 3녀를 두었는데 오(塢)는
상호군이요, 당(塘)은
찰방이요, 호(壕)는
임진에 문광에 등제하여 지금 영돈령으로 있으며, 해(垓)는 병조참지요, 탄(坦은)종부정이요, 파(坡)는 갑오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지금 의영고령으로 있다. 딸 하나는 첨지 ▨▨▨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종실 서림정 지에게 시집갔으며, 하나는 청원정 목에게 시집갔다. 공은 부귀한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고량진미나 비단에 습성이 없이, 용자나
의표는 단중하고 성품과 풍도는 온순하여 관직에 임하여서는 공적인 것을 받들었고 바른 것을 지켰다. 집에
있어서도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린이들을 가르침에는 배움에 힘쓸 것을 권하고 또 충효과 절의에 힘쓰도록
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훈계하였으니 여섯 아들이 뜻을 받들기에 해이함이 없었으며, 또 각자 수립한 바가 있어 통현하는 자리에 올라서는 모두 능하다는 평판이 자자하였다. 공은 문자의 단아함을 좋아하되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글씨와
그림에 힘을 쏟아 그림이 더 절묘하였으나 공은 이것으로 남에게 자랑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얻으려고 아니하였기에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오호라! 공의 덕성과 공의 재주와 공의 현철로 미루어 모두들 크게
이룰 것으로 기대하였었는데 오래 살지도 못하고 크게 베풀어보지도 못하였으니 어떻게 이와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뿌리가 깊게 뻗은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흐름이 반드시 긴 것은 이치가 본래 그리된 것이리라. 윤씨는 안으로 청덕을 쌓았는데 공이 또 전열을 이어 선을 쌓고 경상을 가꿈이 이토록 심원하였으니 비록 자신에
있어서는 수가 덕에 차지 못하고 벼슬이 재능에 따르지 못하였을망정 하늘이 반드시 후손에게 복과 경사를 내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영원이 견천의 딸을 낳아 지존의 배필이 되어 온 나라의 모의가 되고 금지옥엽이 계계승승하여 우리 조선 억만
년 무궁한 경상의 기틀을 세웠으며, 또 영원도 국구의 높은 지위에 올라, 앉아서 복록을 누리고 집안은 융성하며, 자손들의 계술은 면면히 이어짐이니
앞으로의 경사가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글이 졸하니 어떻게 성덕을 표현하여 선영을 돋보이게 하고 후세에까지 빛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척분이 있기 때문에 감이 사양치 못하고 삼가 그 세계의 원파와 공의 역관의 전말과, 영쇠의 종시 대요를 간추려 말을 엮는 바이다. 이어 명하기를, 파평의 윤씨는 그 근원이 깊기도 하구나. 시조로부터 삼한훈에 봉해졌도다. 당당한 문장은 세상의 으뜸이었도다. 문장과 무공, 덕망과 훈업으로 키우고 떨쳤으니 그 소리 크기도 하였도다. 자손들도 선조의 아름다움을 이어서 대대로 계승하였도다. 명문으로 명예를 떨침이 거의 6백 년이 되었구나. 장하고 미더운 파평은 때 맞추어 성세를 만났도다. 이름이 기상에 실리고 공은 대려(帶礪)에 있었도다. 공도 그의 덕을 닮아 크나큰 성망이 있었구나. 하늘은 어찌하여 덕을 낮추어 보고 공에게만 수명을 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두게 되는 법 그래서 그 아들에게 베풀었노라. 형제들 나란히 아름다움 이어서 상서도 쌓이고 복도 모였도다. 초위에 경사 뻗치니 문벌도 더욱 창대해 지누나. 임금이 은혜를 더해주니 금빛 교지 빛나기도 하도다. 제사도 내리고 분황도 올리니 그 향기 향기롭도다. 영광스럽게 크게 꾸밈이 이와 같으니 공은 죽었어도 죽지 않음이로다. 주역에는 적선을 말하고 시전에는 강상을 말하지 않았던가? 하늘의 보시는 크고도 분명한 것이로다. 무덤 있어 당과 같으니 죽산의 언덕이로다. 비마저 높다라니 그 영광 더욱 들치도다. 후예에게 밝게 보이나니 불후함이 있음을.
성화 병오 6월 일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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