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士昕 神道碑 | |
root | 2020.08.26 07:40 | |
右議政襄平公神道碑銘 幷序 公諱士昕字弼甫坡平人 貞熹王后之第十六世祖莘達佐嚴太祖統一三國爲世名臣四傳而及諱瓘代東女眞開地斥疆卓然殊勳秩門下侍中判尙書吏兵部事封鈴平縣開國伯謚文肅又八九傳咸爲大官而諱承諱 贈贊成生領議政府事貞靖公璠貞靖配興寧府大夫人仁川李氏參贊恭度公諱文和之女生公永壬寅四月辛卯日也生而有器宇風度不凡善卜士者多奇之正統甲子蔭補兼 世子洗馬屢遷至內資直長有一僚守身非度公呵責之闔僚皆勑景永乙亥 光陵登極非但以 后親眷佑素器許者多歲未窮屢遷至工曹正郎軍器監正天順己卯夏擢通政刑曹參議尋遷承政院同副承旨秋陞嘉歷吏后戶曹參判仁順漢城府尹轉至資憲中樞府事壬午加崇政成化乙酉移工曹判書兼五衛都摠管戊子 睿聖臨朝轉判中樞府事俄屢陞至大匡輔國崇祿大夫辛卯 主上嗣位嘉公輔贊賜策純誠明亮經濟佐理之號封坡川府院君領敦寧府事乙未拜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丙申復以坡川府院君仍領 經筵自是間罹疾疹 內賜珎鮮藥餌絲絡相望乙巳夏五月疾劇卒于家壽六十四訃聞 上悼甚輟朝市厚思 數賜謚曰襄平 命甥漢城府判尹李鐵堅護喪七月壬辰葬于交河縣瓦洞里先人之兆公學能通道性又喜儉素斥華侈平生直道律身未嘗以私于思於人遇宗族朋齒無表裏見人有過始雖大言不饒而竟優容之怨者是布之配鷄林金氏兵曹正郎自溫之女先卒生一男一女男繼謙推忠定難純誠明亮佐理功臣正憲大夫鈴平君女適京畿觀察使李吉甫側室有四男二女鈴平娶金氏 贈參判雲孫之女生五男四女男曰頊內資判官曰瑄曰珣曰琳曰珷女長適直長安舜齡次適許聃次適洪祉餘幼觀察使生男曰元亮承仕郎旣葬判尹請銘於比長比亦嘗承公接遇知公旣深樂道公之善矣敢辭判尹之請乎益聞根深則枝茂源遠者流長公門起於莘達大於文肅綿延廷愈遠愈大至貞靖誕我 貞熹王后門楣之大於是而極矣豈非所謂根枝茂源遠流長者乎公能以謙虛自持不以門地祿位凌人終始保門戶每隆三 朝眷注而鈴平觀察又聯翩相位公之一世享福誰可得而侔擬耶第公門之大由厥積德公門之慶彌遠彌篤載誕俔天 世聖其匹 眷注時紆富貴來逼門大無憑曰謙而益與國同休又同其戚竹帛記勳鹽梅調羹仁而有年宜壽其生天乎嗇壽享七十輟朝而悲巳矣何及猶賴蘭芝餘慶無極 通政大夫工曹參議兼知制敎 孫比長撰通訓大夫司饔院正金學起書並篆 成化二十二年歲丙午二月立石自碑丑地二十七步甲坐庚向之原葬
우의정 양평공신도비명 병서 공의 이름은 사흔(士昕)이고
자는 필보(弼甫)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제17대조 신달(莘達)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일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 후 4대
뒤 관(瓘)은 여진족을 정벌하여 국경을 개척하는 데 탁월한
공을 세워 문하시중판상서이병부사의 관직을 받고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해졌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뒤 8대손과 9대손이 대관(大官)이
되었는데 찬성을 증직 받은 승휘(承諱)는 영의정부사 정정공
번(璠)을 낳았다. 번의 배필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참찬 공도공 문화(文和)의 딸이다. 영락 20년(1422년) 4월
신묘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기량과 풍채가 비범하여 점을 잘 치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정통(正統) 갑자년(1444년) 음관으로 세자세마를 겸직했고 여러 차례 옮긴 뒤 내자시직장에
이르렀다. 당시 수신(守身)을
잘못한 관리가 있었는데 공이 꾸짖자 모두들 조심하게 되었다. 경태 을해년(1455년) 세조가
등극한 뒤로 왕후의 부모로서 보살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 마음이 맞는 사람도 많았다. 거듭 관직을
옮겨 공조정랑 · 군기감정에 이르렀다. 천순(天順) 기묘년(1459년) 여름에는 통정대부의 자급을 받고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얼마 뒤 승정원동부승지로 옮겼고, 가을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이조와 호조의 참판, 인순(仁順) 한성부윤을 거쳐 자헌대부로서 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임오년(1462년)에는
숭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는
공조판서로 옮기고 오위도총관을 겸직했다. 예종이 등극한 뒤 판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까지 자급이 올랐다. 신묘년(1471, 성종 2년)에 지금의 주상이 왕위를 이어받은 뒤 공의 보좌를 가상히 여겨 순성명량경제좌리(純誠明亮經濟佐理)의 호를 내리고 파천부원군 영돈령부사에 봉하였다. 을미년(1475년)에는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에 제수되었고 병신년(1476년)에는 다시 파천부원군으로서 영경연에 연임되었다. 이때부터 간간이 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왕은 진기하고 귀한 약을 끊임없이 하사하였다. 을사년(1485년) 여름 5월 병세가 심해져 자택에서 사망했다. 나이는 64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몹시 애도하며 조시(朝市)를 정지시켰으며 두터운 은혜를 여러 차례 내렸는데 양평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사위인 한성부판윤 이철견(李鐵堅)에게 호상(護喪)하도록
명하여 7월 임진일 교하현 와동리(交河縣瓦洞里) 선영에 장사지냈다. 공은 도학과 성리학에 능통하였으며 검소한 것을 좋아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배척했다. 평생 올바른 도로 자신을 다스렸고 사사로움으로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친척과 친구를 만나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큰 소리를 치며 용서하지 않을 것같이 했으나 끝내
너그럽게 용서했으므로 원망하던 사람들도 벗이 되었다. 배필 계림(鷄林: 경주) 김씨는 병조정랑 자온(自溫)의
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소생은 1남 1녀로 아들 계겸(繼謙)은
추충정난순성명량좌리공신 정헌대부 영평군(鈴平君)이고, 딸은 경기관찰사 이길보(李吉甫)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으로는 4남 2녀가 있다. 영평군은 참판에 증직된 김운손(金雲孫)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5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욱(頊)은
내자시판관이고 나머지는 선(瑄) · 림(琳) · 무(珷)이며, 세 딸은 직장 안순령(安舜齡), 허담(許聃), 홍지(洪祉)에게 시집갔으며 하나는 어리다.
관찰사의 아들 원량(元亮)은 승사랑이다. 장례를 마친 뒤 이철견이 내게 묘명을 써달라고 청했다. 일찍이 공의
대접을 받았고 또 공이 도를 깊이 즐겼다는 것과 공의 선함을 잘 아는 나로서 감히 판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멀리 흐른다는 것을 익히 들었다. 공의
가문은 신달로부터 일어나 문숙(윤관)에 의해 커지고 면면히
이어져 세월이 갈수록 대단해지다가 윤번이 정희왕후를 낳자 가문의 융성함이 극에 달했다. 어찌 뿌리 깊은
나무의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멀리 흘러간다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은 겸허함으로 몸가짐을
유지하되 가문이나 지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능멸하지 않고 시종일관 가문을 지켰다. 세 왕조에 걸쳐
융숭한 대우를 받고 아들인 영평공과 사위인 관찰사가 줄지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공이 일생동안 누린 복을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
공의 가문 대단함 덕 쌓은 덕택이라 공의 가문 경사는 갈수록 돈독했네 정희왕후 태어나 세조의 배필 되니 돌아봄이 두루두루 부귀공명 몰려오네 기댈 곳 없이 큰 가문 겸양으로 이로워져 나라와 함께 편하고 슬픔도 같이 하니 그 공적 청사에 있네 염매로 국간 맞추듯 인자함이 더해지니 장수해야 마땅하나 하늘이 명에 인색해 70세로 끝났으니 온 조정 슬퍼하여 기댈 곳이 없구나 지초와 난초의 남은 경사 무궁할 것이다
통정대부 공조참의 겸 지제교 손비장(孫比長) 지음. 통훈대부 사옹원정 김학기(金學起) 글씨, 전서(篆書). 성화(成化) 22년 병오년 2월 세움.
비석으로부터 축지(丑地: 북동북향)로 27보 떨어진 갑좌 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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