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로(尹師路)의 묘표(墓表) - 신숙주 | |
root | 2020.08.26 07:19 | |
나 신숙주(申叔舟)가 일찍이
임금이 부르시는 명령을 받들고 새벽에 대궐로 나아가다가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내전(內殿)으로부터 나오는 공을 만났는데, 기색(氣色)이 오슬오슬
떨며 몸을 옴츠리는지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일찍 일어나 추위를 무릅쓰고 나왔는데 땀이 나려고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말을 주고받으며 헤어진 후 나날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은즉, 증세가 점차 위중해진다더니 열흘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아! 공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죽은
지 사흘만에 초빈(草殯)하고 81일이 되는 날에 장단현(長湍縣)
옛 치소(治所) 북쪽 대동(大洞) 묘원에 장사를 지냈는데, 천순(天順) 8년인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 3월 19일 임신(壬申)이었고
향년 41세였다.
아! 공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사로(師路)요 자(字)는 과옹(果翁)이고 성은
윤씨(尹氏)이며, 관향은
옛 파평현인데, 대대로 벼슬하는 가문을 형성해 왔다. 휘
신달(莘達)이 고려의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 공신(三韓功臣)이
되고부터 4대를 내려와 충경공(忠敬公) 휘 관(瓘)에 이르러
숙종(肅宗) 때를 당해 말갈(靺鞨)의 유종(遺種)이 점차 멋대로 날뛰다가 영가(盈哥,
뒷날 금 목종(金穆宗))와 오아속(烏雅束, 뒷날 금 강종(金康宗))이 서로 이어가며 종족을 불러 모아들이어 동북 지역의 근심이 되었다. 이에
충경공이 주창해 틈새를 염탐하는 계책을 세웠다가 예종(睿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북정(北征)의 명을 받아 도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우리의 강토를 개척하였으므로, 동북 지역의 백성들이 그 은덕을 받아 오늘날에 이르도록 끼친 경사가 멀리
퍼져 높은 벼슬자리에 있은 이들이 서로 연이어졌다. 우리 조선조 초기에 미쳐 소정공(昭靖公) 휘 곤(坤)은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는데, 공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조부 휘 희제(希齊)는 검교(檢校) 공조 참의를
지냈다. 아버지 휘 은(垠)은
판광주 목사(判廣州牧使)를 역임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대범해
이르는 곳마다 청렴하고 공평하였는데, 공이 존귀해졌음으로 인해 순충 적덕 병의 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ㆍ우의정ㆍ영평 부원군(鈴平府院君)을 추증받았다. 어머니
용구군 대부인(龍駒郡大夫人)은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 이수상(李守常)의 딸인데, 이씨 역시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성장하여 14세 때 세종(世宗)이
가려 뽑아 정현 옹주(貞顯翁主)에게 장가들이고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다. 얼마
후에 충의위 장(忠義衛將)이 되었으며, 여러 사(司)의 제조(提調)를 지냈는데, 모두
약관에 있었던 일로서 권면히 힘써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 능력에 감복하였으며, 문종(文宗)의 능을 3년 동안
지키면서 공경을 다하였다. 이때 권세를 잡은 간신이 멋대로 명령을 내려 기세가 매우 위태로워지자 지금의
성상(聖上, 세조)이
여러 흉악한 인물을 제거하고 국가를 새로이 만들었는데, 공은 이에 측근에서 임금을 도와 일이 안정되자
좌익 공신(左翼功臣)이 되었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되었으며, 승진해서 영천 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잠시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겸 판이조사(判吏曹事)가
되었다. 임금이 ‘조종(祖宗)께서 법을 세워 제도를 정하여 백년을 전해 오는 동안에 법이 잘못된 것을 뒤따라 고치어 신법과 구법이 어지러이
섞여서 공부(貢賦, 공물과 조세)를 거두어들임에 있어 때에 따라 더하기도 하고 경감하기도 하였으므로, 관리들이
받들어 행하기에 헷갈려 백성들이 가끔 폐해를 당한다’고 생각하시어 크게 상정(詳定)하여 하나로 귀착시키려고 하였는데, 공이 그 일을 맡아 본말을 종합해 자세히 밝히고 사리에 맞도록 다듬으면서 속으로 헤아려보아 정민(精敏)하게끔 하고 조금이라도 빠뜨림이 없었다.
천순(天順) 4년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에 판광주 목사가 치소에서 병들자 임금이 공을 위해 어의(御醫)를 보내고 약을 내려 재빨리 구완했으나 치유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이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예제에 맞게 슬퍼하다가 상복을 벗기
전에 상제의 몸으로 간경도감 제조(刊經都監提調)를 지냈다. 아버지 판광주 목사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동생 몇 명의 혼인에 수요되는 것이 모두 공에게서 나왔으며, 그 나머지 종족(宗族) 중에
어려워서 돌아갈 곳이 없는 자에게는 모두 진휼(賑恤)해주어
거소를 잃지 않도록 한 후에 그쳤다. 재물이 넉넉했는데 모았다가 베푸는 일에도 능해서 사람들이 더욱
어질다고 여겼다.
도진무(都鎭撫)가 되어
금병(禁兵)을 관장했으므로 행행(行幸)할 때마다 반드시 공을 머물러 두어 진수(鎭守)케 하였다. 임금이
종친 중에서 계양군(桂陽君)과 익현군(翼峴君)을 가장 친근히 했고 또 공(功)이 있어 특히 중히 여기었는데 이에 못지 않게 공을 대우하여 침소를 출입함에 막힘 없이 사이가 가까워 사랑하여
의지함이 바야흐로 대단하였는데, 갑자기 수명을 누리지 못했으니, 마음
아프도다.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다가 열흘 동안 보지 못했는데 세상을 떠나니, 애통하도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애도함이 심해 ‘집안사람들의 소리내어 움을 금하라’고
명하여 오히려 그가 소생하기를 바라기까지 하였다.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부조하는 물품을 더해 주었으며, 관에서 장례를 관리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러짐이 없었다고 이를
만하다. 아! 공이라면 무슨 불가함이 있으랴?
공의 아들에 장남 윤반(尹磻)은
절충장군 행 사직(折衝將軍行司直)으로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차남 윤인(尹磷)은 현의교위
행 사정(顯毅校尉行司正)으로 주부(主簿) 유오(柳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윤반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버지의 덕행을
나타내려고 하여, 공을 아는 사람 가운데에 나 신숙주 만한 이가 없다고 여겨 상장(喪杖)을 집고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등용에 있어 풍성히 하였으면서 나이에는 인색했으니, 하늘은 무슨 까닭이며
사람은 어째서 그러한가? 사람에게 고증하지 못하는데 하늘에 어찌 빙거(憑據)할 수 있겠는가? 문사(文詞)를 수합해 비석에 새기노니, 먼 후세에까지 영원히 자손에 복 내리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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